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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여행하는 인문학도를 위한 안내서
김우재 | UCSF 박사후 연구원 | heterosis.tistory.com
적을 아는 데 20년이 걸렸다. 아직 크게 부족하다. 그러나 적을 존경한다. 이 마음을 책에 담는다.김성환, <17세기 자연철학: 운동학 기계론에서 동력학 기계론으로>의 서문 중에서
통섭과 융합이라는 유행어 속에서
과학사는 철학사나 사상사의 맥락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 반대로 17세기 이후의 철학사나 사상사는 과학사를 빼고 논의조차 할 수 없다. 김영식, 「과학사학의 동향과 문제점: 사상사와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사상사학』, Vol.1, No.0, 1987. 필자가 이 논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사가 과학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과학사는 철학사를 포함하려는 노력과 함께 잘못된 과학사의 전통을 바로잡을 필요도 있다. 이 글에서 그러한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방식으로 조율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확인하고 싶다면, 당장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하권을 펼쳐, 뉴턴이나 보일 혹은 다윈 등 과학자의 이름이 얼마나 짤막하게 다루어지는지 찾아보면 된다. 이 책엔 심지어 루드비히 볼츠만처럼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19세기 인물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근세와 현대』, 개정판, 이문출판사, 2008.
각 분과학문의 전문화가 진행된 19세기 이후, 학문들은 자신들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왔다. 모든 분야에서 긴밀한 상호작용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았고, 생물학은 화학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으로부터 받은 세례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고, 인문학도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전문화 과정 중에 나타난 상호작용은 대부분 긴장으로 나타났다. 과학도 대학에 자리잡기 위해 투쟁해야 했고, 인문학도 과학으로부터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OJR Howarth, The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 retrospect 1831-1921, The Association, 1922. 그리고 이제 융합, 통섭, 학제간 연구 따위의 유행어들이 학자들의 머리를 옭아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선 여전히 30년도 더 지난 과학전쟁의 부활을 목도할 수 있다. 당장 인터넷에서 ‘라깡 논쟁’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통섭을 둘러싼 논쟁도 나름대로는 치열하다.
사태는 단순하지 않다. 한쪽에선 물리학의 언어로 통합과학을 추구하던 19세기 비엔나 논리실증주의의 악몽이, 이번엔 생물학의 이름으로─정확히 말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은 '후성유전학적 규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되살아나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선 윌슨의 야욕이 무엇이던 간에 일단 유행을 따라야만 뒤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통섭을 외친다. 한예종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통섭'이라는 제명 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융합과 통섭은 대세다.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그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낼 것이냐고 누구도 묻지 않는 데 있다. 모두가 미래만을 바라볼 뿐, 과거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과학은 역사를 버렸다고 하지만, 이젠 인문학도 역사를 버리려 한다.
과학이라는 유령
과학에 이론이 있다면 인문학엔 이념이 있다. 철학사는 ‘~주의’로 명명된 이념들의 집합으로 서술되고, 역사학은 사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역시 이념을 배제하지 못한다. 과학사회학은 심지어 과학도 사회가 생산하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과학적 생활양식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과학의 세속화 여정’을 거치며 정착했다. 세속화란 단순히 종교로부터의 세속화, 즉 초자연적인 설명을 거부하고 자연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확인 가능한 측정량이 이론을 제한하는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과학적 생활양식에 관한 논의는 이상하 박사의 것이다. 그의 블로그에서 더욱 자세한 논의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http://blog.daum.net/goodking 전통적인 과학학(혹은 메타과학)의 설명방식은 이러한 과학의 소박한 역사성을 무시하고, 정당화의 맥락을 분석하는 데에만 집착해 왔다. 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과학의 이론을 측정량이 제한한다는 맥락에서 인문학의 이념을 제한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논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고, 상식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거대담론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인문학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주 소박한 인식이다. 과학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인문학적 사상사에도 깊이 관여해왔고 관여하고 있으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바로 그 소박한 인식. 과학을 바라보는 인문학도의 관점이 적대적인 것이든, 중립적인 것이든, 맹목적인 것이든 그런 것은 크게 상관없다. 그 어느 방식이든 과학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한 대화는 단절되지 않는다. 과학사는 바로 그 인식에 도움을 준다.
과학과 철학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칸트를 거쳐 로크나 홉스, 뉴턴과 데카르트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는 없다. 18세기까지의 서구사상사에서는 자연철학자들이라 불리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잠시 19세기의 철학사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마르크스와 라깡
마르크스의 <자본론> 서문을 읽는 인문학도들은, 철학을 이해에서 실천으로 전환시킨 위대한 학자의 사상 속에 근대 자연과학의 영향이 뿌리깊게 새겨져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초판의 서문, 바로 그 첫 단락에서 마르크스는 가치이론을 접근하는 자신의 방법론을 세포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의 그것과 연관시킨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영국이라는 사회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를 물리학자가 통제된 조건에서 실험을 행하는 것에 비유한다. 심지어 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작업에 치우쳐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을 등한시했다는 저 유명한 언명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프리드리히 엥겔스 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이론과실천, 2008. 조차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변주된다. “철학은 정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즉 물리학, 수학, 의학, 모든 과학이 각자의 영역 안에서 행한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재기, 「‘철학’, 과학, 계급투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사 연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론』, 통권 2호, 1992, p.20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은 아예 노골적으로 과학교양서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과학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엥겔스 자신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 버날은 엥겔스를 과학자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나키즘의 이론가 중 한명인 크로포트킨은 지리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철학에도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그 영향이 가득 남아있다. <아나키의 철학과 이상>이라는 강연의 초반부에서 그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으로부터 아나키즘의 정당성을 찾는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도서출판 개신, 2009.
당연히 자연과학의 성취를 깊은 이해 없이 사회에 적용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러한 태도는 쉽게 사이비과학을 양산하기 마련이고,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과학자들의 태도보다 더 위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벗어난 모든 학문들, 즉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학문들을 모두 과학적 회의주의의 좁은 날로 재단하려 한다면 과학자들조차 그 날을 비켜가지 못한다. 그 틀 안에서 도킨스의 ‘밈’이라는 개념은 사이비과학이 되고, 윌슨의 ‘통섭’도─스스로 인정하듯─형이상학에 불과한 비과학적인 사상이 될 뿐이다. 당연히 미래학은 대부분 사기에 불과하다(이건 정말 그런 것 같다). 문제는 그런 말꼬리 잡기가 아니다. 에른스트 피셔의 말처럼, 과학자건 철학자건 과학의 성취들을 언론과 대중에게 전파하고 있을 때, 그 작업은 이미 과학이 아닌 것이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해나무, 2009. 그 지점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그들은 이미 철학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과학과 다른 분야의 학문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적절히 조율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반성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와 엥겔스, 크로포트킨이라는 좌파이론의 원조사상가들이 자연과학과 얽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국내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론가이드를 쳐다보는 것이다.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글항아리, 2010. 그곳엔 발음하기도 어려운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과학은 일종의 금기가 되고, 필요 없는 도구가 되며,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물론 가끔은 황당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지적사기’와 ‘과학전쟁’이 그 지점에서 촉발되었다. 왜 상황이 금새 이렇게 바뀌어 버린 것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인문좌파가 있다면 좌파과학자들의 전통도 버젓이 존재한다. 다만 국내의 좌파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뿐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궁금한 독자들은 JD 버날, 홀데인, 조셉 니담을 비롯해서 리처드 르원틴, 존 벡위드,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전통을 추적해보기 바란다. 그들의 역사는 감추어져 있지만 전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대한민국의 좌파는 인문학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 필자가 아는 국내 좌파 논객들의 전공은 대부분 미학, 철학, 신학, 문화비평, 문학비평, 영화비평, 문학, 정치학, 역사학, 법학 등이다. 물론 언제나 경제학자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누구나 들뢰즈를 읽는다면 들뢰즈를 따라 읽는 것이 미덕인지도 모른다. 과학에도 유행이 있듯이 인문학에도 유행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접점: 과학학?
무엇을 목표로 하건, 과학에 접근하고자 하는 국내의 인문학도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문헌은 국내의 과학학자들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다. 아마도 그곳에서 칼 포퍼나,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와 같은 과학철학자들의 이름과, 토머스 쿤과 같은 과학사학자의 이름, 그리고 브루노 라투어, 로버트 머튼과 같은 과학사회학자들의 이름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인문학도들은 곧 ‘과학전쟁’이나 ‘쿤-포퍼 논쟁’과 같은 역사, ‘패러다임’이나 ‘반증가능성’과 같은 개념, 과학문화연구센터, 과사철 협동과정, 과학커뮤니케이션 과정, 과학사상과 같은 명칭에 익숙해진다. 논의의 쟁점들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손쉽게 따라잡기 힘들다. 이미 ‘과학학’이라는 학문체계도 조직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다. 과학학의 각 분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의 이름들에 익숙해지고, 그들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인문학도들은 과학을 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곳엔 과학자들이 귀기울여 듣는 논의는 별로 없다. 과학학과 과학은 따로 논다.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인문학도들은 대중적인 과학자들의 저서를 따라 여행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도킨스의 이름을, 윌슨과 굴드의 이름을 따라 다윈과 헉슬리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문학도들은 인문학자가 강의하는 <종의 기원>을 듣게 되고, 과학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며, 인문학으로 과학을 하고, 경계를 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지점에서도 과학에 관심을 둔 인문학도들은 국내 과학학자들의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많은 논의의 출발점은 이미 독점되어 있다.
그런 경계를 넘는 인문학자들이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불만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과학학자들이 보기에 문제는 연구실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과학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도통 사회문제나 인문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을 끄집어 내기 위해, 혹은 황우석과 같은 과학자가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과학도들의 대학 교양과정에서 인문학 교육을 확대시켜야만 한다. 당연히 인문학도들에게도 과학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잡힐 것이다. 과학학자들이 그러한 중간지대에서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학 연구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전근대적 발상은 사라져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과학과 인문학은 조화롭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좋은 이야기들이다.
인문학의 위기, 이공계 기피
교양 있는 인문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과학도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은 현대사회를 사는 지성인들에게 일종의 교양인데, 과학도들은 무미건조하고 도통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실은 필자의 주변에 있는 과학도들은 ‘과학 그 자체’에 도통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되며, 나쁜 과학자/과학기술자가 된다.
그들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결과들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인문학의 역할은 과학기술을 제어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에겐 인문학적 교양이 결핍되어 있고, 인문학적 교양은 사회에 대한 책임 있는 윤리의식 혹은 성찰을 위해 필수적이며, 따라서 과학기술자들이 인문학의 제어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 이를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부르자.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이러한 관점은 강화되고 확산되었다. ‘인문학적 제어론’에 빠진 인문학도들의 착각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문학자들의─예를 들어 최근 방영된 서울대 학자들의─논문 표절을 반대로 적용시켜보는 것이다.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이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성찰도 인문학의 독점적 지위는 아니다. 인문학적 제어론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대등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학주의에 빠진 몇몇 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을 무지하다고 비웃는 것만큼이나, 인문학적 제어론의 약점은 분명한 것이다. 대화는 상대를 정확히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땅엔 그런 이해가 가능한 대화의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과학이 수입되고 정립되어간 과정을 살펴보면 이 땅의 과학자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수입되었다. 뉴턴에서 라부아지에, 다윈으로 이어지는 과학의 전통은 이 땅의 것이 아니며, 이 땅에서 비슷하게라도 싹을 틔워본 적도 없다. 김우재, ‘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새사연 칼럼, 2010.04.26. 과학은 과학기술이라는 명칭과 혼동되며, 언제나 경제적 효용가치 속에서만 이해된다. 인문학이 위기라면 과학도 위기다. 그 총체적 위기는 이미 대학이 취업 준비소로 전락한 징후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화가 가능하려면 외국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대화를 하건, 논쟁을 하건 간에 그들이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그 토대를 이 땅에 옮겨 심을 필요가 있다. 그런 토대를 건설할 생각도 없이 서로가 상대방의 몰이해를 헐뜯어봐야 남는 것은 저 멀리서 기분 나쁘게 웃는 자본의 추종자들뿐이다.
공부법은 하나가 아니다
토대가 건설되기도 전에 이미 어설픈 대화는 시작된 것 같다. 이 땅의 모든 건설은 그런 식의 삽질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도들에게 그 해결책은 쉽다. 인문학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교육을 시키자. 다만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이 재미를 느끼는 방식으로 조금 더 고민해주면 고마울 일이지만, 이 글에서 논의할 사항은 아니다.
이제 반대편에서, 인문학도들이 과학을 접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 뿌리깊은 불평등이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도들에게는 인문학의 공부법을 강요하면서도, 인문학도들은 과학의 공부법을 따르지 않으려는 불평등이다. 인문학과 대화를 원하는 과학도라면 독서와 사색, 그리고 글쓰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인문학의 공부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대화를 원하는 인문학도들은 관찰과 실험으로 이어지는 과학의 공부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끝끝내 인문학적 공부법, 쿤을 읽고, 포퍼를 읽고, 라투어를 읽고, 세미나를 하는 방식으로 과학을 이해하려고 한다. 좋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인물, 라투어는 실험실에 직접 잠입했던 학자다.
한 과학자가 자신이 과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 희미하게나마 과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학부에서 교과서를 공부하는 시기가 아니다. 과학자는 현장에서 과학자로 성장한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지식들이 실험실에서 몸으로 습득되는 과정은 하루 이틀에 걸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인문학적 교양이 부족한 탓에 글로 그 체험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우연히 그런 재능을 가진 과학자들에 의해 과학은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왔다. 지금과 같은 학문적 풍토와 대학제도 속에서 인문학도들이 과학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실험실을 경험하지 못한 인문학도들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식의 억지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드시 국내의 선학들은 물론, 그들이 추종하는 외국의 학자들까지 놓쳐버린 그 빈 곳을 인식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 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과학에 호기심을 갖는 인문학도들이 아니다. ‘과학과 함께 걷고자’ 하는 인문학도들이다. 이 엄청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론에 앞서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필자는 인문학도들이 실험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머뭇거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과학학이라는 창을 통해 편하게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과학자들의 저술을 직접 읽어보는 방식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인터넷의 시대에, 읽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19세기 과학자들의 저술을 접할 수 있다. 볼츠만과 마흐를, 버날과 홀데인을, 피어슨과 골턴의 저술들을 읽고 싶다면 그저 인터넷을 몇번만 클릭하면 된다. 그런 저술들에 익숙하지 않기는 과학도들도 매한가지다. 오히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독서할 수 있는 인문학도들에게 유리한 작업이 될 것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과학학자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과학자들의 발견의 맥락을 세심히 관찰하고, 과학을 이해하면서,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지, 그 반대편에서 과학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이론을 구성해온 학자들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실천이 적용될 여지가 바로 이곳에도 존재한다. 과학비평을 위해 “과학을 사랑하라”고까지 말하지는 않겠다. 과학자들이 인문학을 홀대할 때 그들에게 답하는 그 방식 그대로의 잣대를 스스로에게 조금만 들이댈 수 있으면 된다.
얼마 전 세상과 작별한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은 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이며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역사학자 콜링우드의 관점을 모두 이어받았다.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작들 속에는 그의 부인이자 과학자인 굿필드(June Goodfield)와 함께 저술했던 ‘물질, 공간, 시간에 관한 3부작’이 들어 있지 않다. The Architecture of Matter(1962), The Fabric of the Heavens(1963), The Discovery of Time(1966) 스승인 콜링우드가 관념론에 집착함으로써 그리스에 대한 향수를 뿌리치지 못한 것처럼, 툴민도 르네상스 인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끝내 뿌리치지 못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인문학도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시중에 흩뿌려진 과학학 서적들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굿필드는 1977년 전미과학자협회에서 주관하는 파이 베타 카파 강연(Phi Beta Kappa lecture)에서, ‘과학 안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 June Goodfield, Humanity in science: a perspective and a plea, Science, 11 November 1977: 580-585. [링크] 과학과 인문학의 대등한 대화를 고민하는 인문학도라면 이 강연을 읽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필자는 이 강연에 덧붙일 말이 거의 없다. 그녀는 과학은 차갑고, 인문학은 따뜻한 것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과학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인문학이 사회를 치료할 것이라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문학도 그렇다. 그녀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처럼 과학자들과 단절되어 있는 학문을 비판하고, 모자이크처럼 흩어져 있는 역사로부터 과학사의 퍼즐을 맞추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녀는 과학사에서 빠져 있는 과학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세밀하게 복원할 것을 요청하며, 이사야 벌린─바로 그 이사야 벌린─이 비코와 헤르더를 되살린 작업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이제이북스, 2005. 과학사를 방법론과 정당화의 맥락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죽은 역사를 만들 뿐이다. 사회에 대한 과학자의 책임을 손쉽게 말하기 전에, 과연 그 사회는 그들이 그런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제대로 사회에 손을 내밀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는지 물어야 한다. 그녀는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누군가 읽기만을 기다리면서.
굿필드의 강연을 직접 읽는 인문학도들이 생기기를 바란다. 툴민의 스승인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R.G. 콜링우드, 『자연이라는 개념』, 이제이북스, 2004. 융합이건, 통섭이건, 대화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시작하기 위한 사람들은 한번쯤 되새겨볼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과학이, 이른바 과학자들만의 것이며, 또한 철학이, 이른바 철학자들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해 온 작업의 원리들을 전혀 반성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가질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과학을 한 번도 철학적으로 성찰해 보지 않은 과학자는 삼류 과학자, 엉터리 과학자, 또는 애송이 과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어떤 경험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경험에 대한 반성을 할 수가 없다. 자연과학을 전혀 공부해 보지 않았거나 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는 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할 때, 대체로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내 보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19세기 이전의 탁월하면서도 저명한 과학자들의 저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과학에 대해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 … 자연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서로 상대방의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고, 또한 전혀 공감하지도 않는 두 분류의 전문직업인들로 분리하는 풍조가 생긴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준 바람직하지 않은 풍조였다. … 그 둘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려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한다.
대화가 계속 진행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대화가 선학들의 과오가 철저히 반성된 토대 위에서 진행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나마 추천하고 싶은 국역과학도서의 목록과 과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도서들의 목록을 다음 링크에 정리해 두었다. 이 목록들을 키워드로 항해한다면 값진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