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7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너무 가벼운, 그래서 더 섬뜩한 폭력
김현서 | idrinizim@gmail.com
무식하고 몰지각하다. 아는 것도 없는데다가, 설마 이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하는 일말의 상식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상상 밖의 전개로 소수를 향한 폭력성을 드러낸다. 문화방송의 수목드라마 “개인의 취향”에 관한 이야기다.
예쁘고 청순한 여자배우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배우가 개연성 없는 사건들을 계기로 동거를 하고 연애감정이 싹트는 상투적인 설정은 한국의 ‘트렌디’ 드라마가 앓는 고질적인 병폐이니 이 글에서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으로 언급할 이 드라마가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이 결코 드라마의 독특한 예술성이나 심미적 가치를 완성하기 위한 요소 따위가 절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임에도 한국 사회 안의 동성애를 향한 보수적인 시각에 대한 주제의식이 없는 것도 모자라, 이미 질릴 만큼 질린 똑같은 전개의 연애이야기 위에 풍문으로 떠도는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짜깁기하며 덕지덕지 누더기를 기워 입힌 것뿐인 이 영상물이, 소수를 향한 몰지각한 폭력을 휘두르고도 묵과될 만큼 독특한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치명적 오류
나는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설정과 전개가 식상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는 나와 달리 이 드라마가 달착지근하며 유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이도 저도 아닌 그만의 독특한 취향에 따라 이 드라마를 평가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개인의 취향’이다! 이에 반해, 동성애를 비롯한 인간의 성적 성향은 개인의 취향 따위가 아니다. 꽤 많은 한국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처럼,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오류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성적 성향(sexual orientation)은 단순히 한 사람의 특징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생물학적 성이나 사회적인 성, 나이, 키, 몸무게와는 달리 어느 특정 인물에 대한 부연설명에 그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적 성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틀 안에서 그 의미를 형성한다. 사람의 성적 성향은 그가 사람과의 관계를 맺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대부분 사람에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오는 만족감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정체성을 형성한다. 결국, 한 개인의 성적 성향은 그의 본연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그의 우주, 그 자신과 같기에 단순히 한 개인의 특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⑴. 이처럼 성적 성향을 한 개인의 특징으로 규격화하는 것만으로도 문제 있는 구석이 있는데, 드라마가 개인의 ‘취향’ 따위로 성적 성향을 오인하는 것은 그 본질에 대한 몰지각한 이해도를 말해주고 있다. 얼마든지 바뀌거나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취향은 머리 스타일이나 패션 감각, 영화 장르나 맛집 평가에나 적용되는 단어지,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성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다.
성적 성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진부하고 어느 정도 두루뭉술한 설명도 이제는 지겹다. 인간이 눈이 있어 보고, 배가 고파 먹고, 다리가 있어 걷고 왼손, 오른손, 양손잡이가 있듯 성적 성향 역시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일 뿐이다. 영장류부터 땅을 기는 벌레까지 적어도 1,500종 이상의 동물에게서 동성애가 두루 관찰되고 있다⑵. 그것으로 ‘인간의 동성애가 윤리적으로 타당한가?’의 의제와 별개로 동성애가 생물학적 변종이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성애는 근대에 들어서 살기 편해진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 유행하는 놀이나 문화도 아니다. 산업화 이전에 존재한 문명이나 민족 가운데 40퍼센트는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아브라함이라는 공통 뿌리를 가진 세계의 삼대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를 제외하고는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문명도 상당수였다⑶. 이처럼 동성애는 무지한 이들이 호도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착도, 정신병도 아니고 그것 그대로 자연스레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드라마 “개인의 취향”은 정형화된 동성애적 편견들을 주워들고 소수 성적 성향의 사람들이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를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것을 시작으로 해 그들을 조롱한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풍자와 조롱의 지켜야 할 경계선도, 그 의미도 알지 못한 채 무분별한 폭력을 희화화하거나 확대재생산하고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이 코미디, 즉 풍자라고 믿는 것
먼저 드라마가 ‘풍자’했다고 믿는 몇몇 신을 나열하기에 앞서 1부 봉태규가 술취한 손예진을 모텔로 데려가 강간하려다 실패하는 신이 희화화되는 장면에서부터 제작진의 정신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봉태규가 자신을 강간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정신이 든 손예진이 봉태규를 질타하고 봉태규는 ‘그래 나 미쳤다.’라고 되레 큰소리를 치다가 손예진에게 방안에서 이리저리 쫓기며 구타(?)를 당한다/ 이 장면은 경쾌한 배경음과 빠르게 감기로 편집이 되어 마치 두 이성친구 사이의 익살스런 장난을 보는 듯하다. 어이가 없다. 제작진의 강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게 당연한 성범죄에 대한 인식도 이리 무감각한데, 보수적인 한국 사회 안의 동성애같이 예민하고 복잡한 주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절망적인 불감증을 안고 있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바로 다음 신, 같은 모텔 옆방에 투숙하고 있던 이민호와 이민호에게 매달리는 듯 보이는 임슬옹과, 그것을 목격하는 손예진, 이 셋 사이에 경박한 배경음이 흐른다. 경쾌하고 유쾌한 드라마니까, 손예진이 이민호를 동성애자라 지레짐작하는 신이 코믹하고 우스꽝스러워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도에서 나온 장면이다. 똑같은 배경음이 얼마 후 결혼식장에서 쓰이는데, 바로 조은지가 이민호와 같은 직장 동료인 정성화를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신이다. 이민호가 정성화의 끼인 바지 지퍼를 올려주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조은지가 그것을 성적인 장면으로 오해한다는 설정이다. 여기까지는 등장인물들이 이민호를 동성애자로 오해하는 장면을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유쾌한 드라마 분위기에 편승해 진행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줄줄이 문제의 대사들과 장면들이 따라나온다.
(손예진에게 이민호를 세입자로 들이라고 설득하면서)
조은지 개인아. 게이 남자친구 진짜 환타스틱한 거거든.
(후에 이어지는 상상도에 이민호의 요리 솜씨, 쇼핑 파트너, 피부관리 파트너로 동성애자를 묘사한다.)
(이민호를 세입자로 들이고 조은지와 손예진이 방문 너머로 정성화가 이민호의 다친 다리에 약을 발라주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민호 아이. 살살해.
정성화 뭘 살살해.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 그럼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들어간다. (야릇한 신음) 조금만 참아.
(자신들의 엿듣는 행위가 동성애를 향한 명백한 관음증이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동성애에 대해 천박한 편견으로 일관하는 것은 차마 듣고 있기가 힘들다.)
(손예진이 왕지혜에게 이민호가 게이임을 알려주면서)
손예진 왜 혹시 알아. 니 매력에 저 사람 취향까지 바뀔지?
왕지혜 그래, 나 같지 않다는 게 겨우 게이 남자나 끌어들이는 거니?
(포장마차, 자신의 부인을 희롱했다는 취객이 이민호를 폭행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며)
손예진 (술에 취한 채) 우리 진호씨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아니라니까요. 이 남자는 게이라고요.
(말을 잇지 못하는 취객, 손예진을 입막음하는 이민호, 여전히 경쾌히 흐르는 배경음악과 유쾌한 편집)
이후 정성화가 손예진의 오해에 대해 알게 되고 장단을 맞춰 게이 연기에 동참한 다음부터 그 ‘풍자’는 더욱 힘을 얻고 게이에 대한 편견은 계속 이어진다. 류승룡이 진지한 동성애자의 역할로 분하여 그나마 상식적인 인물로 동성애자를 표현하려 한 제작진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하다. 게이가 아닌 남자 이민호를 게이인 류승룡이 사랑하게 되는 작가의 그릇된 환상이 가미된 설정이나, 류승룡이 등장하는 신의 동성애자를 향한 편협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 대사들은 여전히 낯뜨겁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이 조롱하는 것은 특정 소수 성적 성향의 사람들이다. 조은지의 캐릭터를 통해서는 게이를 단순한 여성의 환상으로 변질시켜 무성적이고 겉만 번드르르한 이미지를 씌웠으며, 정성화를 통해서는 게이를 목소리 톤이 높고 패션에 관심이 많으며 여자와 말이 잘 통하고 하하 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캐릭터로 희화화시킨다. 이것이 폭력이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이 간과한 강자의 ‘조롱’과 약자의 ‘조롱’, 같은 단어 다른 뜻
왜 소수 성적 성향의 사람들을 희화화하는 것이 폭력인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유명한 미국 농담이 있다.
(이 농담의 화자는 흑인이다)“흑인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흑인, 하나는 깜둥이(niggers). 흑인이 좀 재밌게 살아보려고 하면 꼭 깜둥이가 몰려와서 깽판을 쳐. 진짜 ×같은 깜둥이 좀 꺼지라고 해. 이 깜둥이들 때문에 나이트클럽이 사흘을 못 가. 영화 좀 보려고 하면 첫째 주는 도무지 제대로 관람을 못해. 왜냐고? 깜둥이들이 화면에다가 총질을 해대니까! 그 무식한 짓은 대체 왜 하는 거야. 난 흑인 사랑해, 좋다고 흑인. 하지만, 깜둥이들은 ×같이 싫어. 깜둥이를 생각하면 누가 나 좀 KKK단에 가입시켜줬으면 좋겠어. 깜둥이들은 바로 옆집 살면서 내 집에 있는 플라스마 티브이를 새벽에 훔쳐가고 다음날 버젓이 나타나 싱글거리면서 지껄이지, “어제 도둑맞았다면서?”. 깜둥이들은 말이야 지들이 꼭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색내기를 그렇게 좋아해. 예를 들어 이런 거, “나 오늘 내 새끼 밥 먹였어”. 야, 이 정신 나간 놈아. 당연히 네 자식 밥을 먹여야지! 그게 자랑할 일이야? “난 한 번도 감옥에 안 갔어”, 그래서 어쩌라고 이 바보 같은 자식아! 감옥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야, 아, 이 삶에 대해 진짜 관대한 기대치를 가진 깜둥이 자식아!흑인은 깜둥이를 깜둥이라 부를 수 있어. 잘하는 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야. 하지만, 백인은 흑인을 절대 깜둥이라 부르면 안 돼. 알잖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거. 하지만, 이럴 때는 괜찮아. 거 왜 신나고 빵빵 울려대는 흑인 힙합노래 따라 부르다가 깜둥이라는 단어 나오면 괜히 웅얼웅얼 얼버무리고 주위에 있는 흑인 눈치 보잖아. 안 그래도 돼. 일부러 깜둥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노래의 한 부분이니까. 거기서 깜둥이라는 단어 안 들어가면 느낌이 안 살잖아? 알지? 그렇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힙합 랩 따라 할 때는 괜찮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 외에는 절대 백인은 흑인을 깜둥이라 부르면 안 돼. 알잖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거. 하지만, 백인이 흑인을 깜둥이라고 불러도 되는 경우가 딱 한 번 있기는 해. 이건 진짜 비밀인데 너에게만 말해줄게. 네가 만약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자식새끼 챙겨줄 슈퍼맨 피겨 인형을 장난감 가게에서 샀단 말이지. 다른 곳 어디에 가도 물량이 동난 그 피겨를 그 밤 내내 돌아다녀서 겨우 샀어. 집 앞에 도착한 그 시간 새벽 두 시 하고 두 시 반 사이에, 다른 시간은 절대 안 돼. 꼭 새벽 두 시 하고 두 시 반 사이에서만 말이지, 어떤 깜둥이 자식이 갑자기 나타나서 너한테 총구를 겨누며 개똥이 버려진 잔디밭에 네 머리를 들이밀고 삥을 뜯었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밤새도록 네 자식새끼 주려고 산 슈퍼맨 피겨 인형도 가져갔어. 그러면! 그때! 그때야 비로소 넌 외쳐도 되는 거야. 이 개같은 깜둥이 ××× 자식아!⑷”
약자는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강자의 조롱은 폭력이고 약자의 조롱은 풍자다. 강자의 조롱은 편견에서 비롯되고 차별로 이어진다. 약자의 조롱은 인식에서 시작하고 균형으로 이뤄진다. 당신은 강자인가? 당신의 것을 내려놓고 인류의 균형을 맞춰라. 당신이 약자인가? 끊임없이 강자를 조롱하고 풍자하라. 이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도대체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한국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소수적 성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차별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아예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것인가? 도대체 이런 약자를 향한 야만적인 폭력이 공중파 방송에서 어떻게 버젓이 행해질 수 있는가? 무식하고 몰지각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가벼운 폭력이 더 섬뜩한 이유
“Don’t Ask, Don’t Tell”이라는 미국 국방성 정책이 있다. 미국에서 원칙적으로 군 복무를 할 수 없는 동성애자를 어우르기 위해, 군 복무 시 자신의 성적 성향을 노출하지도 말고 타인의 성적 성향을 묻지도 말라는 정책이다. 이러한 미국의 국방성 정책이 성적 소수자들을 차별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문이 있었다. 적게는 45%부터 많게는 60%의 미국 시민이 미국 국방성의 이 정책이 성적 차별이라고 응답했다⑸. 미국 동성애자들의 수는 지금이나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여전히 똑같은 소수이지만, 그들을 인정하는 집단은 이제 소수가 아니거나, 약자인 소수의 처지에서 점점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동성애는 다른 여러 성도착 증세처럼 정신병으로 진단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설문은 긍정적인 의미로 충격적이다. 바로 이런 진보된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미국 미디어에서 동성애를 비롯한 여러 다른 성적 성향에 대한 풍자가 점점 관용되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니,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비틀어 풍자함으로써 오히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비상식을 깨부수는 것이 건강한 조롱이다. 과연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지금 건강하게 조롱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식한 폭력을 마치 폭력이 아닌 양 유쾌한 배경음과 장난스런 편집으로 기만하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는가?
단순히 공중파에 동성애라는 주제를 노출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로 성소수자들을 향한 한국 사회의 인식 개선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기기만은 가당치도 않다. 그들이 정녕 동성애에 대한 여러 편견을 나열함으로 시청자가 그 편견을 직시하고 동성애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바로잡기를 바랐다면, 그들의 드라마가 이렇게 비웃으며 성찰 없이 희화화하고 조롱하고 사과하고 울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식일 수는 없다. 동성애라는 주제는 작가의 환상과 게이를 향한 편견 속에 허우적대면서 주제의식도 없이 진중하지 못한 제작윤리로 접근할 문제가 애당초 아니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성실한 풍자로 대변하던 블랑카를 단순히 웃긴 개그맨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뚱뚱한 여자가 멸시당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회에서 뚱뚱한 여자가 자기의 비대한 몸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유머로 ‘승화’되며 여러 사람에게 아무런 불편함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홍석천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걸고 방송에 나와 토로한 의미심장한 발언이 -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게이일 수도 있습니다. - 캡처 당해 여러 포탈과 유머 사이트에서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사진으로 악용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비상식적인 사회에, 소수의 약자가 신음하는 불균형한 이 사회에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제작자는 심사숙고하고 고뇌해야 했을 문제를 그 가볍고 날랜 ‘트렌디’함으로 또 하나의 폭력을 얹어 휘두르고 있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 강자의 찬동과 싸구려 웃음으로 범벅된 소소한 시청률 말고 더 있단 말인가? 그 가벼운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여져 더 섬뜩하다 - 이성애자에게도, 그리고 어쩌면 이성애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1) 미국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 사건 번호 S147999, In re Marriage Cases Judicial Council Coordination Proceeding, No. 4365, 아미쿠스 쿠리아이(Amicus Curiae) 미국심리협회 취지서, p. 6, p. 7.
(2) Bruce Bagemihl, Biological Exuberance: Animal Homosexuality and Natural Diversity, St. Martin's Press, 1999.
(3) John Bancroft, June Machover Reinisch, Adolescence and Puberty (Kinsey Institute Series, 1990), p. 162.
(4) Keith Truesdell, Director, Bring the Pain, 1997.
(5) CNN, Gates: Pentagon preparing repeal of ‘don’t ask, don’t tell’ policy,
http://edition.cnn.com/2010/POLITICS/02/02/gays.military/index.html?eref=rss_politics&iref=polticker (February 2,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