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역사: 장일순 - 원주에서 살다

조회 수 4506 추천 수 0 2010.02.09 14:03:43

장일순 : 원주에서 살다


연재를 시작하며|현대사 속 무관의 사상가들
2009년. 10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와 고용불안 그리고 청년 실업은 한국 사회를 다시 요동치게 하고 있다. 1997년 경제위기는 개발주의 혹은 발전주의로 규정되던 한국 사회의 기본 얼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비정규직, 실업자 그리고 88만원 세대 등 경제위기는 한국 사회를 시장, 경쟁, 업적, 실적 등의 용어로 덧칠해 놓았다. 그리고10년이 지난 지금, 개인의 삶은 피폐해져가고 인문학적인 사유 체계는 붕괴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근본적 사유의 복원을 모색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2009년 상반기 연재에서는 자본주의, 폭력, 문명 그리고 새로운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숙고한 현대사 속 인물들인 사회운동가 장일순, 아동문학가 권정생 그리고 사회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함석헌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세 사람은 사회운동계나 지식사회에서도 크게 조명을 받거나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지 않은 이들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현실과 긴장을 지니며 60년대 이후 개발주의, 민주주의, 평화, 폭력 그리고 진정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평생 추구한‘무관의 사상가’들이다. 첫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무위당 장일순이다. 원주를 민주주의와 협동조합 운동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온 원주 사회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바로 장일순에 의해 세워졌다. 장일순의 삶은 民의 일상과 생활에 기반을 둔 비시장적 자율 공동체를 위한 모색과 실천으로 채워졌다. 이번 연재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청년들이 지향해야 될 삶의 가치와 일상의 형태에 대해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원주와 장일순
장일순. 그는 무위당, 좁쌀 한 알 등으로 알려진 원주 사람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장일순?’하며 물음표를 던질지도 모른다. 한국정치사나 사회운동사 등에서 장일순이라는 이름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차라리 ‘지학순’이라면 원주 교구를 오랫동안 이끈 주교로 기억하지만, 장일순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주를 떠올릴 때 군사도시나 토지문학관 등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원주는 반역의 도시였다. 이중환의〈택리지〉에 나오는 원주는 늘 서울을 넘보고 반역하는 곳으로 묘사된 다. 장일순은 이런 원주를 터로 삼아 50년대 이후 원주 사회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직접 앞에 나서진 않아도 서민들의 일상과 함께 하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정치투쟁을 중심으로 한 당대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결을 지닌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지식인의 전위에 의한 국가권력 중심적 운동이 아닌,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협동조합 운동이자 다양한 民의 연대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장일순이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해준 사람은 그의 조부와 스승 박기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이다. 장일순은 차강 박기정의암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 투쟁을 하다가,  평창도암으로 낙향하여 묵객으로생활하며,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던 인물이었다 으로부터 글씨와 그림을 배웠으며, 사물과 현상 그리고 역사와 현실을 올바르게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되었다. 또한 유년기 그의 집 앞에는 천도교 포교소가 있어서, 일찍이 동학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해월은 그가 생명운동-협동조합과 한살림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사상적 배경이었다.


1952년부터 원주에 살면서 그는 외골수처럼 권력과 싸웠다. 해방 직후에는 국대안반대운동1946년 국립대학안을 반대하여 일어난 동맹휴학사건, 원 월드 운동One World Movement에 참여했고, 몽양 여운형을 따라 50년대는 냉전의 절벽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했으며, 4∙19 직후에는 사회대중당 등을 통해 진보적 사회의 건설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50년대에 장일순은 대성학교 설립이라는 실험을 했다. 한국전쟁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 1952년 원주로 돌아온 그는 경영이 어려운 성육고등공민학교를 1953년에 인수, 교장에 취임했다. 그의 나이 26세 때 일이었다. 1954년에는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름을 대성이라고 지은 이유는 도산 안창호의 대성학원의 맥을 잇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 당시 그에게 큰 정신적 기둥은 평화통일론으로 진보당을 이끌던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그는 50년대 죽산을 따르며 평화통일운동을 주창했으며, 그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민족통일과 민주화라는 큰 화두 속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몽양으로부터 사회주의를, 죽산으로부터 통일을 그리고 유가와 가톨릭, 동학 등 여러 흐름을 교접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를 운동에 접합시켰다.

 


공동체와 사회운동 : 1960~70년대 원주
1958년 장일순은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 못했고, 1960년 4∙19 이후에도 사회대중당으로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 뒤 그는 61년 군사쿠데타 직후 투옥된다. 그 이유는 평화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해왔기 때문이었다. 8.15 광복절 행사 때 장일순은 연단에 올라가서 평화통일을 외쳤다. ‘북진통일’이 국시였던 50년대에 그는 당연히 빨갱이로 몰리다가 군사쿠데타 이후, ‘강원도 대표’로 용공혐의로 투옥되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정치활동금지법에 의해 활동을 규제받다가, 1967년부터는 사회안전법에 의해 ‘감옥 밖의 감옥’을 겪어야 했다. 늘 집 앞에는 경찰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돈 버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성당에서도 그는 ‘빨갱이’라고 주변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묶인 신체’와 ‘모욕적 언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와 가까워지면 미움을 사거나 배척당할 위험이 있어서, 그것이 찜찜한 사람들은 교류조차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런 조건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이들이 그와 교류를 했다.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들어앉아서 책만 보면 공산주의 사상만 깊게 들어간다고 오해하잖아요. 그러니 붓장난이라도 하고 있어야 ‘저 사람 서예하고 지낸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p. 127 경찰서, 안기부…그 분들이 수시로 오셔서 늘 감시를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지요. 그래서 글은 일절 못썼어요. 이름이 들어간다거나 해서 다른 분들이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미행이 붙는 날에는 잘 아는 사람을 만나도 그저 얼굴이나 아는 사람인 양하고 지나쳐야 했어요.”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p. 190. 장일순의 아내인 이인숙의 회고이다

한편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갈수록 악랄해지는 군사정권에 맞서 대적할 힘으로 가톨릭교회를 선택했다. 사회안전법 등 반공주의적 검열을 받는 상황에서, 장일순 역시 초기 교회 참여에는‘은신처’란 의미도 존재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불교는 회중이 자주 모이지 못하지만, 천주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므로 예수의 건전한 말을 따르는 생활을 유도하면 사람들에게 삶의 에너지가 될 것이란 생각에서 가톨릭교회에 평신도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회운동을 정치운동이나 정치투쟁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고 ‘사회정의 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정당정치면에서 진보나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뿌리를 박고 사는 생활인들이 하는 삶의 운동’을 꾸준히 강조했다. 출소한 뒤 그는 대성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복귀했지만,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당했고, 권력게임과 야합이 판치는 정치판보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사회운동에 집중한다. 그는 “정치를 하고 싶어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을 이래서는 안 되고 건져내어야 한다고 보니까 자연히 정치권에 발언도 하게 되고… 그것은 사회정의운동이지 정치운동은 아니지요.”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p. 151라고 말한다.


이런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1965년 원주대교구 지학순 주교와의 만남은 장일순에게 하나의 전환이었다. 월남민 출신인 젊은 사제와 원주 토박이 사회운동가는 음과 양으로 원주 공동체-혹자는 원주 공화국이라고 부르지만-를 이끌어 갔다. 마침 교회를 변화시킬 꿈을 품고 있던 지학순은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았고, 이를 맡아 해낼 능력을 지닌 장일순과의 만남은 열정과 사상의 결합이었다. 이들은 초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소개하며 교회의 사회참여를 주도했다. 지학순은 주교가 되자마자 일본어로 된 공의회 문서를 구입, 향후 천주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것으로 잡았다. 장일순과 가까웠던 리영희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장일순 선생님은) 언제나 뒤에서 지학순 주교님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드리고는 했지요. 사실 지학순 주교님은 본래 사회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인자하시고 순진하셨으며, 열정적인 분이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과의 은근하고 태연한 관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지요.” 최성현『, 좁쌀한알』, 도솔, p. 35

다른 한편 장일순이 살던 60년대 농촌은 어려운 시절이었다. 예를 들어 부락공동기금의 부정한 사용, 장리쌀, 고리사채 등의 성행은 농민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점차 상호간 불신도 늘어갔다. 이런 조건 하에서 어려운 농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고 자립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초기 신용협동조합의 정신이었다. 실제 1968년경부터 장일순은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며, 지역공동체를 가꾸었으며, 특히 여주와 태백 일대에 물난리가 났을 때 재해대책위원회를 통해 民의 자율적 삶의 공간을 개척하고자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새마을운동이 가속화되었을 때도 원주의 신협과 협동조합운동은 분명한 지향을 지녔다. 단적인 예로 관에 의한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운동이라는 점, 그리고 돈을 매개로 한 조직이 아닌 일상적 만남과 인간적 접촉이 중심인 조직 운영을 했다는 점 등이 있다. 이처럼 그에게 협동조합운동은 교육과 철학에 기반을 두고 운동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인간화 운동’이었다.


협동조합운동은 동일한 작물을 생산해낼 수 있는 생산협동체를 구성, 이들이 모여서 마을총회를 통해 마을 일을 민주적이고 협동적으로 처리하는 자기조절적 생산협동 조직을 지향했다. 물론 당시가 유신 시절이었기에 이들은 관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과 광산촌에 약 74개의 생협이 만들어 졌으며, 관련을 맺고 활동한 지역역시 3개도 13개 시군, 47개 읍면, 129개 리, 17개 광업소에 이르렀다.


이처럼 70년대 원주에서는 농촌및 광산운동, 이창복 등이 참여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노동운동, 김지하 등 청년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그리고 지학순 등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부정부패 반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사회참여 등이 중층적으로 전개되었다. 흔히 ‘원주 민주공화국’이라고 불릴만했다. 하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자, 농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동시 병행하는 것에 대한 긴장이 존재했으며, 이를 외부적으로 보호해준 이는 지학순이었고 내적으로 근거를 마련해준 이는 장일순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기 장일순은 협동조합이나 신용조합 등에 어떤 지향을 부여했던 것일까? 일각에서는 이를 농업사회주의 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장본인이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다만 같이 운동을 전개한 박재일은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활동을 농업사회주의라고 보는 분들이 있는 데 무위당 선생님이 농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경제학적 의미에서 농업을 말한 것이 아니라 農 그 자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셨지요. 농은 인간의 삶과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요. 선생님이 내게 주신 글씨가 食以爲天이에요. 의식주라는 필수조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농업이란 말입니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편,『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 2004, p. 171~172


그렇다면 70년대 원주, 그리고 장일순의 운동은 여기서 멈추었을까?

 


1977년, 전환 : 생명운동과‘한살림’
오늘날 ‘장일순’하면 사람들은 ‘한살림운동’을 떠올리곤 한다. 장일순이 한살림운동의 대표 인물이 된 배경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소비자협동조합과 반 독재 사회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장일순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즉 기존의 운동 방식이 지닌 한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전면전 형식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처럼 장일순은 1977년을 기점으로 정치 이전의 근원적인 문명의 문제에 천착한 자연과 공생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스스로 방향을 모색했다. 바로 상생, 도농간 협동과 협조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실험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결과가 ‘한살림운동’이었다. 그는 한살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 살면서 매일같이 엎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한쪽만 보기 때문에 엎어진단 말이야.우리가 모두 소비자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어요? 소비자가 없으면 농사꾼이 먹고 살 수 있어요?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 조건은 그렇게 돼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p. 36

이처럼 장일순은 한살림공동체운동을 비폭력-공동체 질서에 기초하고, 비시장적 논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보았다. 즉 낭비와 파괴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구로부터 가능한 독립성을 유지, 자치적 해방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한 살림공동체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 한살림공동체운동이 종래 주류 사회변혁운동에 비교하여 특히 새로운 점은 그것이 철저히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하여 지금까지 우리 삶을 지배해왔던 권력추구적, 배타적 경쟁의 원리를 넘어서 어디까지나 자율적이며 협동적인 공생의 질서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p. 163~165


이어 장일순은 56세였던 1983년, 농산물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직거래조직이었지만, 환경오염 등으로 사라지는 하늘과 땅과 물과 밥상을 되살리자는 취지가 있었다. 더 이상 농촌 그리고 농민만의 협동-소비조합 운동은 한계가 있으며, 도시 노동자, 빈민, 이들과 농촌이 함께 힘을 모아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주라는 강원도의 작은 농촌의 활동은 점차 약해지므로, 도시 소비자들과 손을 잡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8년에는 70여명의 조합원들이 모여서 ‘한살림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하고, 한살림이 생활협동운동의 틀을 지니게 되었다. 바로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업을 생태-협동적으로 살려내어, 그 농산물을 도농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9년 한살림모임과 한살림선언이 발표된다.

 


왜 지금 장일순인가? : ‘기라’, ‘쭉정이’ 그리고 근원적으로 사고하라
이상으로 5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장일순의 사상과 운동에 대해 소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장일순의 운동과 사상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운동 내 오도된 전위의식에 대한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일순은 주변 활동가들에게 자주 “농민앞에서 기라”고 말했다. 즉 전위인 양 행세하며 대중을 지도하거나 군림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는 대중과 전위 등의 구도에 대한 비판이다. 동시에 그는 시장적 기제에서 자유로운 삶을 강조했는데, 한살림 운동은 지식인이 아닌 ‘떨거지’나 하는 운동이라며, 무욕한 삶, 즉 ‘쭉정이처럼 삶’을 강조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경쟁, 합리화, 시장이 아닌‘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즉 자기중심적 배타적 권력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난해지길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장일순에게 운동은 공생과 조화이며, 그에게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을 의미했다. 생전의 한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운동이란) 전체가 다 공생하자는 이야기죠. 운동이라는 것이 뭐냐했을 때 으레 투쟁이 기본이냐, 아니면 조화가 기본이냐로 갈리죠. 나는 조화가 기본이라고 봅니다. 상대를 없애버리는 해결은 해결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저것이 있는 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없애버리면 해결이 있을 수 없죠. 혁명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죠. 새로운 삶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전심투구하는 노력 속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것이잖아요.”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p. 133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비폭력-공동체 내 구성원 사이의 공생을 강조하는 그의 운동관은 새로운운동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현재, 재평가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일순이 평소 자주 이야기한 ‘원시판본(原始板本)’, 즉 근원적인 것을 재고하는 것이다. 시류에 따라 스스로를 시장적인 삶에 침윤시키는 것이 아닌, 다시 인간적인 삶, 공동체에 대한 사고를 일상과 생활에서 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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