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펀지밥에게 소환마법을 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동심을 자극하는 호러물
<보글보글 스펀지밥> 혹은 <네모네모 스펀지송> 을 맨 처음 봤을 때, 피가 흐르지 않고 살이 뜯겨나가지 않을 뿐이지 호러물이라고 생각했다. 두 발로 걸어다니는 물고기 시민들은 게살버거에 심취해서 햄버거만 먹고, 게살버거 비법을 가지고 있는 개걸사장(주 : 오타 아님) 은 떼돈을 벌면서도 비정규직 노동자인 스펀지밥과 깐깐징어를 ‘비정규직’으로만 부려댄다. 깐깐징어는 이런 개걸사장의 정책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저 자신의 클라리넷과 그림솜씨에 취해있다. 스폰지밥은 개걸사장의 착취에 비판의식 따위는 전혀 없고, 오히려 게살버거를 자기 자식 마냥, 개걸사장을 아버지처럼 여긴다. 잔인성은 고용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비키니 시티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인 인어맨은 조개 브래지어를 찬 할아버지이고 매일 악당에게 당하기만 한다. 육지에서 온 다람쥐 파다는 왕따를 당한다.
그러나 스펀지밥이 온 세상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는 만화일 수있는 이유는 끔찍한 장면들이 전혀 잔인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쾌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만화적 기법’이 주는 비현실성이나, 환상적인 바닷 속 세계라는 설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핵심은스펀지밥의 웃음소리이다.“ 따아아아아아~”라고 몸통 전체를 부들부들 떨면서, 마치 소리가 스펀지 구멍에서도 나올 것처럼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모습이 매우 광대 같다.
멍청하고 똘끼도 있는 히어로
스펀지밥의 웃음소리에 익숙해지는 것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 웃음소리조차도 호러의 일부분이라고 여겼다. 오븐과 냉장고, 후라이팬이 전부인데다가 새하얀 타일이 사방에 붙어있는 집게리아의 부엌에서 스펀지밥은 ‘혼자서’ 빵과 패티를 굽고 햄버거를 얹는다. 스펀지밥은 그의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그의 생산물인 게살버거를 마치 자식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는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고 보는 게 더 알맞았다. 실험실 같이 새파랗고 네모진 공간에서 손과 다리를 사방으로 뻗어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는데, 혼자서만 일하다 보니 중얼중얼 혼잣말이 끊이지 않았고 급기에는 생물이 아닌 사물에게 말을 걸고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의 웃음은 영화 ‘미저리’의 주인공여자가 큰 목소리로 웃는 것처럼 미친 사람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그런데도 그가 미쳤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스펀지밥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스펀지밥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하다. 그는 바보 친구인 뚱이와 아이스크림 주점에서 취할 때까지 아이스크림을 먹고, 해파리 초원에서 해파리 사냥을 하면서 대자연의 신비를 느낀다. 누구와도 친해지기 힘든 깐깐징어도 그의 친화력에서는 번번이 무너지는데, 깐깐징어는 스펀지밥이 매일 아침 그의 집에 놀러 오는 것이 귀찮아서 항상 이사갈 궁리를 하지만, 막상 하루라도 오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그의 천진난만함은 때로, 비키니 시티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일조한다. 인어맨이 망쳐놓은 일을 스펀지밥이 ‘어쩌다보니’ 해결해 놓는 꼴이다. 아무리 미친 사람같아 보이는 스펀지밥이라도, 이야기의 결말이 언제나 해피엔딩이니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스펀지밥의 ‘광기’는 그의 총명함을 감추는 보호색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겉으로 멍청해 보이지만 사실은 천재인 사람처럼 말이다.
스펀지밥 시청자의 가상과 현실 사이
‘일견 미친 사람인’ 스펀지밥을 긍정하기까지는 어떤 혼란에 빠져야 했다. 현실의 나는 스펀지밥이 처한 상황이 미치도록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유치한 스펀지밥은 항상 즐겁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펀지밥 때문에 그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되고 비키니 시티는 항상 평온한 질서를 유지한다. 그것을 보는 나는 혼란에 휩싸인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비키니 시티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 세계의 결과가 항상 ‘행복’이기에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비정규직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비결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실제 현실에서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비키니 시티에서, 현실과는 달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고 있는 스펀지 밥이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있진않나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만화’를 보며 ‘정치적’생각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의 해결책을 비키니 시티 사람들에게서 찾아내보려 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예를 들어, 스펀지밥과 깐깐징어의 관계에서 지식인과 무지한 대중의 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기존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이라면 간단한 일이다. 자본가인 개걸사장의 폭력에 깐깐징어는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만, 스펀지밥은 개걸사장의 논리에 휘말려 머뭇거린다. 결국 이 둘은 평소의 친분을 바탕으로 연대를 모색한다. 그래서 나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거리감이 해소되는 방안을 혹시 만화에서 제시하진 않을까 하고 잠시 집중해보지만, 사건은 내가 예상도 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지식인와 대중사이의 갈등이라는 소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일면 비슷한 고리를 가지고 동질감을 느낀다했어도, 그 배후를 캐고 들어가면 생각지도 않았던 인과관계가 드러난다. 그 둘이 개걸사장에 저항하는 에피소드는 결국 스펀지밥이 실수로 가게를 부수면서, 개걸사장에게 혼나고 마는 것으로 끝이 난다. 스펀지밥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현실의 질서는 너무나 다르다.
이런 작은 실패에도 스펀지밥이 싫지는 않는다. 노란색 네모 스펀지가 내는 웃음소리도 경쾌하고, 비키니 시티사람들이 모여 투덕거리며 사는 모습도 흥미롭다. 보는 나는 중간 중간 낚여서 또 현실과의 고리를 찾고 희망을 걸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에 이어지는이야기는 나의 의문과 상관없이 진행된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내 고민은 무시되지만 그래도 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가 그려진 슬리퍼를 사고, 노란색 네모난 가방에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주 : 이 때문에 미취학 아동인 사촌동생과 교감할 수 있었던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 비키니 시티의 가상과 현실 사이의 혼란은 일차적으로 나의 질문이 ‘낚인 것’정도의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됨과 함께 정리된다.
스펀지밥 애호가의 현실과 가상사이
여기가 바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내팽개쳐진 내 모습이 자조적인 대목이다. 현실의 나에겐 패밀리레스토랑 알바를 하면서 일은 엄청 부려먹으면서 시급은 짜다고 분노하는 친구가있다. 또한 나는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는 몸에도 나쁠 뿐더러 돈 없는 사람들에게 먹이는 사료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스펀지밥을 볼 때면 그런 문제의식들이 희화적으로만 표현되어 있어 간단하게 해결되고 혹은 무시되는 데에 익숙해져 간다. 닉켈로디언 스펀지밥의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개걸사장의 고용착취를 성토한다’고 따지는 것이 황당한 일인 만큼, 현실의 고용착취에도 스펀지밥이 웃어넘기듯 그렇게웃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다. 같은 일이 현실에 일어나 뉴스에 등장한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입장을 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화 속 가상 세계에서 일어났든 현실에서 일어났든 간에 ‘고려해 볼 만한 것’으로만 남겨지고 만다.
그런데 더 혼란스러운 것은 스펀지밥이 나를 무디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스펀지밥을 찾는 내 모습이다. 스펀지밥의 웃음은 만화를 보는 중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좋다. “따아아아아~”라고 진짜 웃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지만 그냥 ‘많이 웃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비키니 시티에서 몇몇 연결고리로 나타내보인 것보다 더욱 더 현실이 어렵다는 점이다. 미친 척 하지 않고는 현실을 버틸 순 없을 거라고 자위하며 스펀지밥의 행동을 지켜보는 나는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에서 벗어나 조금 덜 복잡한 혼란이 차라리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차악이 주는 편안함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유미|편집위원|seoym97@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