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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 이후

조회 수 1756 추천 수 0 2007.04.10 01: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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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 이후


“여기서 그냥 사는 거야. 여긴 우리 집이다.”

영호는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라가 아버지의 부대를 마루 밑에 놓았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런 이야길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가 내준 철거 계고장을 막 읽고 난 참이었다.
“시에서 아파트를 지어놨다니까 얘긴 그걸로 끝난 거다.”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녜요.”
영호가 말했다.
“돈도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영희는 마당가 팬지꽃 앞에 서 있었다.
“우린 못 떠나. 갈 곳이 없어. 그렇지 큰 오빠?“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8월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성명서 한 장을 보게 되었다. 성명서의 제목은‘국적 포기하고 난민신청 하겠다는 우리의 판교주민들!’이었다. 그 글은 판교에 관해 매일같이 들려오는 뉴스에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판교주민들은 신도시 개발로 인해 강제로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8월 3일 난민신청을 하려 했으나 이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나라로 보내 줄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생계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절망을 넘어서 분노에 차 있었다. 도대체 판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명서에 쓰인 단체이름을 수첩에 베껴 적었다.

“지금 심정이요? 당연히 억울하죠. 억울하고 화가나요.”

그리고 8월 20일. 직접 주민들의 말씀을 듣기 위해 판교로 향했다. 지하철 서현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내가 찾아가는 곳은‘판교철거민대책위원회’라는 단체였다. 미리 연락드렸을 때 동사무소를 찾아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께 판교동사무소로 간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께서는 찾아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그 동네 지금 다 철거돼서 길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거든요”. 과연 큰 길을 지나 판교에 들어서자 도로 양쪽에 건물의 잔해들만이 쌓여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도로변에는 플랜카드가 여러 장 걸려있었고 어디선가‘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사무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위원장님을 비롯한 몇 분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 먼저 난민신청에 관한 것을 여쭈어봤다.

“나는 군대 가라해서 군대도 갔다 오고, 의료 보험료다 뭐다하는 세금들도 꼬박 꼬박 다 냈어요. 나라에서 하라는 건 다 했어요. 그런데 나라에서는 우리를 강제로 쫓아내겠대요. 아무리 생계대책, 이주대책을 달라해도 대답이 없어요. 보상을 해달라고 하면 법이 없다고 안된대요. 이건 나라도 아니에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난민신청해서 다른 나라에서 살겠다는 거죠.”위원장님은 울분이 쌓이셨는지 잠시 말을 멈추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난민신청은 원래 안 되는 거에요. 우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을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니까 한거에요. 언론에서는 그러더라구요. 쇼라고. 보상 많이 받아먹으려고 쇼하는 거라고. 또 어디에서는 새로운 투쟁방법이라고도 하대요. 그런데 그건 쇼도, 새로운 투쟁방법도 아니었어요. 나는 대한민국이 그래도 살만한 나라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이제는 아니에요.”

위원장님은 담담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담담할 수가 없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세입자들과 공장이에요. 집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보상 받고 다 떠났어요. 지금 남은 사람들은 다 돈 없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나라에서는 이사비용 30만원하고 주거이전비 750만원을 대출해준다고 해요. 그런데 이 주변이 판교 때문에 땅값이 엄청 올랐잖아요. 그 돈으로는 아무것도 못해요. 공장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요구는 다른 게 아니에요. 현실적인 대책을 달라는 거죠. 그런데 더 문제는 무허가건물들이에요. 서울에서 살다가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 모인데가 여기에요. 여기는 원래 화훼나 가구공장 하는 곳인데, 공장도 다 비닐하우스로 만들었어요. 공장 하나도 빠듯한데 집을 얻을 수 있겠어요? 그냥 공장 옆에 조그맣게 덧대서 집을 만들어 산거죠. 공장이 아니더라도 작게 그냥 집 만들어서 살고, 애들 크면 그 옆에 방 하나 더 만들고. 그렇게 산거에요. 그런데 그게 무허가라면 세금도 안 내야되는거잖아요? 동사무소에 등기도 안 되어 있어야하구요. 그런데 세금은 다 냈어요. 애들 학교도 가야 되니까 동사무소에도 다 올라가 있구요. 그런데 개발 들어간다니까 싹 지워버린거에요. 그래놓고선 무허가건물이기 때문에 공장도 집도 다 보상을 못해주겠대요. 이런 사람들이 700세대가 있어요. 구청이나 그런데 가서 말하면 법이 없어서 보상이 안 된대요. 그러면서 우리보고 국회에 가서 법을 만들어 오래요. 그러면 해주겠다고. 이게 국가 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판교에 납골당이 들어오게 됐거든요. 그건 애초에 개발계획에 없었던 거에요. 법을 새로 만들어서 끼워 넣은 거죠. 그런 법은 잘도 만들면서 우리 법은 안 만들어줘요. 죽은 사람 자리는 만들어주면서 산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거죠.”

위원장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무허가 건물에서 사시는 분을 직접 만나게 해주신다고 했다. 철없는 마음에 그러겠다고 하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간 곳은 비닐하우스로 만든 공장이었다. 노래방에 있는 소파 등을 만드는 곳인데, 개발이 된다는 소리에 주문이 안 들어와 놀리고 있다고 하셨다. 한 아주머니께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남편께서는 오산 수청동에 철거민들을 도와주러 가셨다가 감옥에 가 계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힘들게 입을 떼셨다.

“지금 심정이요? 당연히 억울하죠. 억울하고 화가 나요. 무허가건물이라지만 그 집에서 20년을 살았어요. 거기서 가정도 꾸리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그런데 나가라면서 370만원을 주겠대요. 그걸로 뭘 하라는건지 모르겠어요. 다섯 식구 모두 고시원가서 살라는 게 아니고서야. 우리는 정말 국민 된 도리를 다 했어요. 그런데 국가에서 하는 일은 무조건 파괴하는 일 뿐이에요. 수청동에서도 그래요. 경찰들은 철거민들을 테러범으로 몰고 있지만 경찰들은 콘테이너를 매달고 그 앞에서 물대포를 쏘았어요. 기중기로 사람들을 눌러버리기도 했구요. 수청동 주민 두 분은 그 일로 몸을 못 쓰게 되셨어요. 정말로 무지막지해요. 이런 상태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켜요. 경찰들이, 법이 사람을 속이고 때리는데. 법원에 가도 높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데 어떻게 애들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어
요. 너무 화가 나고 무서워요. 정부는 있는 사람 손만 들어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한데, 마음은 너무 무거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옆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께서 말을 이으셨다.

“정말 오래 투쟁했어요. 월요일마다 회의를 하는데, 거기 오시는 70대 할머니들이‘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세요. 얼마나 투쟁가를 오래 틀어 놓았으면 애들도 하나씩 다 부르고 다녀요. 아마 여기 애들은 동요보다 투쟁가를 더 잘 부를 거예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기를 쓰고 투쟁하는 거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싸움은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거예요. 부모가 가난하면 가난했지 아이들한테 되물림 할 수는 없잖아요. 철거민은 70년대부터 있었어요. 이제는 이 싸움을 끝내야 돼요.”

가슴이 답답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저씨께서 사진 잘 나오는 곳으로 데려다주신다고 하셨다. 철거는 올해 봄부터 시작되었다. 아저씨의 뒤를 따라 지나는 골목 골목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한 채도 없었다. 부서진 문, 무너진 벽, 뒹구는 식기들의 잔해만이 이 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살았던 집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이끌고 걸어가던 중 아저씨께서“여기에요”라고 하시며 걸음을 멈추셨다. 깨진 콘크리트가 수북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그 너머에는 분당 시내의 세련된 고층 빌딩이 보였다.

“판교에 납골당이 생긴다는 소리 들으셨죠? 얼마 전에 분당사람들이랑 판교사람들이랑 같이 싸웠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싸우는 목적이 다르더라고요. 우리는 그래, 납골당 필요하다, 우리 장묘문화 바꿔야 된다, 근데 산 사람 대책 먼저 만들어줘라 이랬거든요. 근데 분당 사람들은 납골당 생기면 땅값 떨어진다고, 그래서 반대하는 거더라구요. 그런데서 좀 차이가 있어요.”아저씨께서 말을 이으셨다.

“전 한때 노사모였어요. 대선 하기 한 2주일 전에는 하는 일 다 팽개치고 노사모 활동만 했어요. 노무현이 당선되는 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나오더라구요. 주위 사람들도 다 저한테 전화했어요. 축하한다고. 꼭 내가 당선된 것처럼. 나는 진짜 이제는 뭔가 바뀌겠구나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아저씨께서는 26일에 철거하러 온다고 했으니 그때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셨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철거된 집들의 사진을 찍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이 땅에 붙어 있어야죠. 끈질기게”

그러던 8월 23일. 뉴스에서 판교에서 철거가 실시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놀라서 판교에 전화를 걸더니 위원장님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서 부상당하신 분이 있다고 뉴스에 나오던데 많이 다치셨냐고 여쭈어 보았다. 위원장님께서는“저도 조금 다쳤어요”라며 허허 웃으셨다. 걱정도 되고 좀 더 자세한 전말도 들어야 될 것 같아서 다시 판교를 찾았다. 저번에 뵈었던 아저씨가 계셨다. 용역들과 몸싸움 중에 안경이 깨져서 10년 전에 쓰던 안경을 끼었다고 하셨다. 먼저 26일에 철거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쭈어봤다.

“26일에 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일부러 흘린 소문이었어요. 사실 용역 깡패들은 22일부터 소방서에서 잤다고 해요. 경찰차가 15대, 용역이 400명 왔다고 하대요. 그러다가 23일 새벽 4시 경에 갑자기 튀어나온거에요. 주민들이 준비를 하기는 했는데 용역들이 네 명씩 달라붙어서 끌고 나가니까 손을 쓸 수가 없더라구요. 어떤 사람은 용역한테 골목으로 끌려 들어가서 엄청 얻어맞았대요. 그렇게 해서 동사무소 주변이 싹 다 철거됐어요. 19가구요. 그 골목이 판교에서는 번화가거든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거죠.”

위원장님도 다치셨다고 들었다고 하니, 팔이 조금 다치셨다고 하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론에 보도가 되고 사람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는데도 정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절대 무리한 것이 아니에요. 현실적인 대책을 달라는거, 그거에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달라는 건데 그건 투쟁으로 얻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알아서 해줘야 되는 거에요. 해결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지극히 간단한 건데 안 되니까 힘든거에요. 벽이 있어요. 이제는 이 벽을 깨는 방법은 무력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청동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던 거에요. 우리도 무력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아마 10월쯤 다시 철거 하러 올거에요. 그때를 대비하고 있어요. 이번 연말까지 모두 철거한다고 하는데 막아야죠. 어떻게는 이 땅에 붙어 있어야죠. 끈질기게.”

책이 나오면 책 들고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씀 드리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저씨께서는 그럼 저녁때 와서 소주도 마시고 그러자고 하셨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역시 지난 번보다 철거된 건물들이 늘어있었다.‘ 건설 폐기물’이라고 쓰인 큰 트럭이 지나갔다. 아마 철거된 집에서 나온 가구나 돌 같은 것들을 옮기는 차량인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폐기물이겠지만 그것은 철거민들에게는 터전이었고 삶이었다. 그 트럭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도, 가훈을 써 놓은 액자도, 매일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던 식탁도 깨지고 부서진 채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처음처럼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돌아설 때 본 아저씨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일종의 결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벌써 하늘이 푸른, 가을이었다.


영|수습위원|navi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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