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없는 엄마와 조숙한 아이들의 영화
악당
어렸을 적 보았던 영화에서는 항상 ‘악당’이 등장했었다. 배트맨이 있었으면 조커맨이 있어야 했고, 태권브이가 있었으면? 스모로봇이 있어야 했다. ‘강하고 사악한 악당’이 없으면 이야기는 항상 심심했다. 심지어 인간의 희로애락을 좀 더 현실화시켜서 보여주던 휴먼드라마에서조차도 나쁜 놈들은 꼭 한명씩 등장했었다. 나는 이들이 벌 받는 모습을 보며 좋아했고, 동시에‘순수한’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며 기분 좋은 안도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브라운관에서 눈을 뗀 뒤 바라본 세상은 조금 달랐다. 사람들은 여전히 ‘악당’을 만들어내는 것을 즐겼고, 텔레비전만 켜면 어렸을 때 봤던 것 보다 훨씬 더 악랄한 놈들이 등장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안도하지 못했다. 연극의 배경화가‘현실’이 된 이상 나도 더 이상 무조건 착한 놈이 아니었고, 나쁜 놈도 무조건 나쁜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상일은‘무 자르듯이’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소년만화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희대의 살인마’나 ‘악의 축’같은 나쁜 놈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처치하자며 선동하고 있다. 도덕적 단죄의 칼은 항상 우리가 쥐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그런 면에서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이런 사람들에게 잠시만 모든 평가는 접어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모른다> 는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악당영화’이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면 반드시 분노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우리는 분노의 대상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몇몇은‘누군가에게 <악당> 이라는 명찰을 달아줘야 하는데…’라면서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불안함을 이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벗어보자.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
일본 동경의 작은 아파트에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하나 도착한다. 거기에서 내린 3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는 6학년 쯤 되는 남자아이와 함께 익숙한 걸음으로 곧장 새로 이사 온 아파트로 걸어 들어간다. 새로운 이웃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다. 여자는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제 남편은 외국에서 일하고 있어서 집에 없고, 제가 가진 아이는 이 아이 하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엄마는 아이가 성적도 우수하고 영어도 잘한다고 덧붙인다. 아이도 옆에서 쑥스럽게 웃는다. 인사를 마치고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 이삿짐 트럭에서 커다란 트렁크를 몇 개 꺼낸다. 그런데 트렁크를 여는 순간 나오는 것은 옷가지나 짐이 아니라 바로‘아이들’이다. 나오자마자 깔깔거리며 좋아하는 아이들. 유치원생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대의 아이들은 힘들다는 기색도 없이 마치 게임을 하듯이 다시 아파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그런데 잠깐, 분명 아까 그 여자는 아이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아이들이었을까. 대답은,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관객이 아닌 영화 속 이웃들은 말이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혹은 사회전체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들이었다.
이분법에게 던지는 메세지
<아무도 모른다> 는 14년전 실제 일본에서 일어난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이라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씨가 각각 다른 4남매는 영화제목처럼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을 키우는 (혹은 키움 ‘당하는’)철이 없고 아름다운 엄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이웃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는 다시 새로운 남자를 찾아 동거를 시작하고 모든 살림을 큰아들에게 맡기고 떠나버린다. 생활비를 아들의 손에 쥐어주는 그녀는 마치 며칠 동안 휴가 가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가 일을 나갔을 때, 원래 했던 것처럼, 집안일을 익숙하게 계속해나간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는 일은 각자가 분담하면서 그렇게 계절이 3차례나 지나간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면서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가는 와중에 막내 동생이 문을 열다가 의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담담하게 동생을 집에 왔을 때 넣어두었던 트렁크에 다시 넣어 묻어준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던 이들의 생활도 끝이 난다.
줄거리만 보면, 굉장히 끔찍한 현실고발 영화 같다. 하지만 감독도 절대 ‘재현드라마’가 아니라고 강조했듯이 이 영화의 백미는 이 엄청난 사건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시선에 있다. 엄마가 없다고 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들의 일상에는 엄마가 없고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오는 고통보다는, 끊임없이 삶을 재생산해내려고 애쓰는 생명력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방식은 지극히 어린이다워서 오히려 보는 이들이 놀라울 정도이다. 길가에 핀 잡초를 보고 ‘누가 여기다가 버렸나봐’라며 집으로 가져와 화분에 옮겨 심는 아이의 모습에서는 엄마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 찾아 삼만리’식의 집착보다는, 엄마가 없어도 ‘삶은 이어진다’는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이들은 엄마를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장난도 치고 친구도 사귀고, 책도 읽으면서 보낸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아이들의 1년은 고통스러운 시간의 흔적이라기보다는 때로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는 담담한 일상 그대로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근근이 살아갔던 삶의 단초들을 어머니와 이 사회 어른들에 대한 반성의 촉구로 연결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아이들을 버린‘악당’으로 엄마를 내몰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조금 더 사실적으로 드러나는 엄마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조금 덜 떨어지는 엄마’에 불과하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칭얼거린다. “그럼 엄마는 행복해 질 수 없는 거니?” 이 한마디 속에서 모든 사회적 잣대와 연민의 기준들이 뭉뚱그려진다. 즉, 쉽게 이분법을 적용시키는 대부분의 픽션에게 영화는 삶과 인간이란 결코‘착하거나 나쁘다’라는 기준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원래 도덕적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기준들은 섣부른 분노와 그에 대한‘재단’만을 남긴다. 하지만, 그것을 잠시 유보하면 이렇게‘연민’을 남기고 그것이 한사람의‘비행’에 대한 이해로까지 이어지게끔 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피임하는 방법도 몰라서 대책 없이 애를 넷이나 낳고, 글을 못 읽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 채 아이들을 방치했던 엄마와 그녀의 배후에 자리잡게 된 사회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녀의 말대로“엄마가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녀가 행복했으려면, 이토록 무책임하게 그녀를 버리고 가는 남성들이 없었어야 한다. 또, 성씨가 다른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분위기와 경제적 조건들이 충족되었어야 한다. 신기하게도 정작 영화에서는 엄마의 바람이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그녀를 통해 비판받아야 할 것은‘인간 배후의 사회’이지‘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마치 종교적인 포용정신과도 같이 숭고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담담한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집단적으로 변할 때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엄마’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 영화는 거기까지만 목소리를 낸다.‘엄마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불쌍하지 않느냐’는 식의 가벼운 연민이 아니다. 영화는 놀랍게도 인간에 대한 ‘평가’를 유보시킴으로서 역설적으로 ‘평가의 기준’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는 죄책감
때로 ‘평가를 유보하는 일’은 방관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필요한 순간마다 때로는 제한된 선택항 중 하나만 택해야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가를 유보하던 엄마도 선택의 순간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선택 항목이 있었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함으로서 그녀는 ‘추악한 어른’으로 단죄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악당이 생겨나면서 반대급부로 ‘순수하고 불쌍한 어린이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렇게도 바꿔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도 결국은 나와 같은 어른들의 시선으로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악당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의식의 대리인 격으로 엄마를 희생시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정작 아이들은 그냥 때로는 미워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거기에 별다른 관심 없이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뿐’이었다. 이렇듯 삶의 감각이 도덕적 잣대의 배후에 존재한다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평가에 있어서 과거보다 조금은 더 신중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시원|고대 중앙 영화 연구회 돌빛 회원|100-coo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