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고등학생 시절 춘향전을 보고 한국에 매료된 젊은이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고대에 왔다. 난생 처음 보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불타는 향학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국의 고려대학교에 왔다. 그는 한국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춘향전에 대해 토론하고, 막걸리를 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울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수업 중 영어 강의가 50%이다. 수업 시간에 교수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이해시키는데 진을 빼고, 학생들은 쩔쩔매며 영어로 받아 적기 바쁘다. 게다가 수업 시간 외에도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너무나도 바빠 보여 말 붙일 엄두도 안 난다. 나중에 사정을 알아보니 04년부터 ‘제 2전공이수’, ‘ 영어 강의 5개 이상 수강’, ‘한자졸업요건’등이 생겨나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망스러움을 시설 좋은 외국인 전용 기숙사에서 미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영어공부를 하는 것으로 자족하려 했지만, 이럴 바에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지금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이다. 위 이야기는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20년 정도만 늦게 태어났으면 어땠을지 본좌가 상상해 본 일에 불과하다. 다만 몇 년 후 러시아 청년이 겪을 수도 있을 법하기에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세계화’,‘ 세계 100대 대학’...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어온 말들이다. 잠시 과거를 돌아보자면 95년 고대가 발표한‘고려대학교 발전계획(안)’이란 게 있었다. 여기에는‘대학원 중심으로의 발전계획’을 위해‘2005년까지 단계적으로 대학원 정원을 늘려 학부 재학생의 50%(1만명)로 확대’(1995:15%, 1996-1998:25%, 1999-2000:40%, 2003-2004:50%)하고‘교수를 5백여명 증원하여 교수 총원이 1,330명이 되어 학부생 기준으로 학생 대 교수의 비가 15:1이 되게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목표까지 나와 있어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05년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는 것과 5개 학문분야는 세계정상, 15개 학문 분야는 국내 정상에 오르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세계 100대 대학을 평가하는 기관은 한 둘이 아닐뿐더러 어떤 기관이 더 합리적인 평가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위의 계획을 얼마만큼 이행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영국 < 더 타임즈> 의 평가를 참고하기로 하겠다. <더 타임즈> 가 발표한 세계 상위 200대 대학 순위에는 한국 소재 대학 중 서울대(119위)와 한국과학기술원(160위), 그리고 포항 공대(163위)만이 들어 있다. 고대는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본과생 1만 5천명 정도, 석사생 7천여명, 박사생 3천 여명으로 석박사생이 학부생 대비 66%인 중국 푸단대학은 196위에 랭크되었다. 반면 순위에도 없는 고대는 3만 6천명의 본과생(서창+안암)에 석사생 1,300여명, 박사생 400여명으로 대학원생이 학부생의 4.5%에 불과하다. 교수 수도 푸단대학이 전임 이상 교수가 2300여 명인데 비해, 고대는 전체 교원의 수는 4300여 명이지만 전임 이상 교수는 1천 명 수준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 대 교수 비가 36:1이다.
‘세계 100대 대학’가는거야~?
이른바 ‘세계 최고’라 불리는 대학의 교수 1인당 학생수가 10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갈 길이 정말 많이 남았다. (도쿄대 9.8:1, 베이징대 10:1, 하버드대 9.3:1) 세계 100대 대학을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고대가 95년 설정한 구체적인 계획은 달성되지 않았다.
현재의 장기발전계획도 이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 기한은 알 수 없지만 대학원생수를 학부 재학생의 50% 수준으로 늘리려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학문 분야를 국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10개 이상의 분야에서 세계최고수준을 달성하겠다고 한다. 세계 100대 대학으로의 진입은 2010년까지로‘잠시’미뤄졌다.
그렇다면 2003년 부임한 어윤대 총장이 세계 100대 대학으로 가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하고 200%이상 성공했다고 자평하는‘Global KU’프로젝트가 제대로 실행되어 고대에 다니는“수혜자”들에게 혜택을 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 총장은 정말로 지금 세계 100대 대학으로 가는 기차표를 제대로 끊었을까.
「글로벌 KU 프로젝트」의 골자는 영어위주의 외국어 교육 강화와 국제교류 촉진, 핵심교양 개편에 덤으로 한자교육 강화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 ▲2004년부터 모든 전공과목 20% 이상 영어 강의 ▲2006년까지 영어 강의 비중 30%까지 확대 ▲ 2010년까지 영어 강의 50%까지 확대 ▲신임 교원의 영어 강의 의무화 ▲「7+1학기제」(국제어문학부의 경우 8학기 중 1학기는 해당 언어권 해외 현지 대학에서 수학해야 졸업가능) 도입 ▲교양 과정 전체를 전임 교원이 강의 ▲한자 교육 강화 ▲ 매년 850명의 교환학생 파견 등을 계획했다.
어 총장은 2005년 5월 3일자 주간동아(제 438호)와의 인터뷰에서“영어 강의 비중이 5% 수준에서 2년 사이에 25%로 5배”가 되었고“영어 강의로 인해 얻는 효과가 월등하기 때문에 계속 확대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학교는 이를 계속 추진하여 2010년엔 영어 강의를 50%까지 끌어올릴 계획을 갖고 있다.‘ 영어 강의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월등한 효과’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이기에 학생에게 절반이나 영어로 수업을 듣게 하려는 것일까. 아마도 어 총장은 영어 강의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효과가 있으며, 외국 학생들이 고대를 찾는 데 있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기대했을 것이다. 어 총장은“이런 전략과 방침이 계속되면 외국 대학이나 외국 학생들이 보는 일등대학은 고려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총장이 ‘04년도부터 전공과목 20%이상 영어 강의 의무화’라는 지침을 내렸음에도 학과 별로 실행율의 편차가 컸다. 한문학과 박성규 교수는“눈을 씻고 한국 고전문학을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있는 선생을 찾아”봤지만 없었다며“세계에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이번 학기 한문학과에 영어 강의가 개설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번 학기에 전공과목 중 1개의 영어 강의만을 개설한 한국사학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사학과장 이진한 교수는“한국 사학과 교수 일동은 한국사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의 실효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총장의 글로벌 인재 양성 방침에 따라 2005년도 2학기의 한국사 전공에 영어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외국 학생일지라도“그들이 한국사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습득”해야 하며, 한국 학생이“교양이 아닌 전문적인 한국사를 영어로 배우는 것은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 이외에 한국사 강좌로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신임 교원 채용 시 영어 시연을 평가에 넣고, 신임교원에게 영어 강의를 시키는 것에 대해 사학과 이상신 교수는“학과 특성상 필요하다는 자체적인 판단으로 진행된다면 괜찮겠지만 이런 식으로 일률적으로 진행시키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부당하지~”를 연발하셨다. 모든 학문에 이런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2004년 100명의 신임 교수를 채용하려다 32명 밖에 채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교양’이를 부탁해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 총장은“대학의 국제경쟁력 강화는 물론이고 국가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커리큘럼의 변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고민으로 1학년 교양과목을 개편했다고 한다. 질적인 측면에서 100대 대학에 다가서기 위해‘글로벌 리더 양성’이라는 하버드 대학식의 신입생 교양을 그대로 가져왔고, 그것이 지금의 핵심교양이다. 어 총장은 또한 지금까지 주로 박사과정이나 박사를 갓 마친 강사들이 맡아 온 교양 과목을 개편해 105과목 전체를 전임 교원이 가르치도록 했다. 어 총장은“다른 대학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 흡족해 했다. 전임 교원에게 신입생 교양 105과목을 맡기는 일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일일 수는 있겠으나, 전임 교수에게 강의를 맡기는 것만으로 강의의 질이 담보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에피소드1
「7+1학기제」(국제어문학부의 경우 8학기 중 1학기는 해당 언어권 해외 현지 대학에서 수학해야 졸업 가능) 도입은 어느 새 필수가 아닌 선택 조건이 되었다. 한자 교육 강화를 위해 생긴 한자인증시험은 기업인이 총장에게 요새 대학생들 한자를 왜 이렇게 모르냐고 무안을 줘서 생겼다. 이런 것들은 학부모와 수험생, 그리고 기업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질러놓은 것이다. 나중에 수습이 안 되면 의무 사항이 아닌 것으로 발을 빼면 될 일인가보다. 걸 맞는 교육환경은 제공하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만 많은 학교의 태도는 그들이 오직 고대가 외부에 어떻게 보여지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다시 박노자에게로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가 한국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강의는 영어로 하지요?”라고 한다. 그런 질문을 받는 그도 당혹스럽겠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놀라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세계 대학 평가에서‘60위권’인 오슬로 대학의 원칙은 학생들이 모국어로 수업 받을‘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영문 전공과목을 제외하고는 영어교양 과목조차 개설되지 않는다. 영어로 개설된 과목은 전체의 10%이하로 있긴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전환해 준 것이라 한다. 외국인 교수 임용 때에도 노르웨이인과 같은 기회를 주지만 이들은 2~3년 안에 노르웨이어로 강의할 수 있도록 요구한다고 한다.
어 총장은 세계 100대 대학에 들기 위한 요건 중 하나로 국제화를 말한다. 졸업 요건 중 졸업 전 ‘영어 강의 5개 수강’은 한국 학생에게 영어 강의를 듣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 가지 의문은‘영어로 강의하는 비율을 평가하는 기관이 중요한가, 아니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의사가 중요한가’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학과의 교수와 학생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하면‘세계 100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것인 양 강요하는 어 총장에게도 고민이 있다고 한다. 외국 물먹고 들어온 수많은 고대생들이‘연세대생’처럼 될까봐 걱정이란다. 명색이“CEO총장”인데 자기 공장에서 생산해낸 물건이 경쟁회사 물건과 별 차이가 없게 될까 두렵나보다. 이런 차원의 고민 말고 어떻게 다양한 학생들의 자발적인 학구열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나 좀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 매 학기 끝날 때 마다 하는 수업 평가를 공개하거나 수업 개설을 해당 학과 교수나 학생들과도 좀 더 상의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보는 데 힘을 들였으면 한다. 이런 일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 어 총장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 하는‘세계 100대 대학’보다‘100배’는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