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인권’은 현대 사회에서 당연하게 지켜져야 할 규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개인 간의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행동을 제약받지 않을 자유로 해석되거나, 논의의 폭이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3자의 위치에서 설정되기도 한다. 이에 2009년 하반기, 고대문화에서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다시금 인권의 지반을 확장해보고자 한다. 여성의 경험 자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의 권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지난 두 편의 연재에서는 그늘에 가리어져 있던 성노동자들, 이중적인 민족주의의 시각 속에서 표류하는 제3세계 여성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성폭력 문제를 페미니즘의 프리즘을 통해 다시 만나보자.

 

가부장적 피해자 보호주의를 넘어 차별없는 성적자기결정권 보장이 필요하다

김민혜정|한국성폭력상담소|ksvrc@sisters.or.kr

 

 

올해 반성폭력 운동계에 가장 큰 뉴스를 꼽으라고 하면 조○○ 어린이 성폭력 사건이 아닐까 한다. KBS ‘시사기획 쌈’이 지난 9월 말 전자발찌 시행 1년을 맞아 아동성폭력에 대한 보도를 한 후, 사례로 보도된 조○○ 사건에 대한 여론은 유례없이 거세게 형성되었다. 대법원판결 결과를 바꾸자는 온라인 서명이 있었고, 해외에서도 촛불시위가 열렸다.

정부와 정치권, 언론도 그 어느 때보다 성폭력에 드높은 관심을 쏟아냈다. 발의된 법 개정안만 10개에 달하고,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 법안도 재조명되었다. 10월 발표된 국무총리실 아동여성보호대책단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전자발찌 기한이 늘어나고,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양형기준도 상향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법무부는 최근 아동성범죄자의 처벌수준을 30년부터 종신형에 이르기까지 상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철통같은 처벌 기준이 설정되면 우리는 성폭력이 왜 문제인지 더 깊이 있게 말할 수 있게 될까? 더 많은 자유와 평등, 인권감수성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아동성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가 형성된 만큼이나 어린이의지위와 발언권, 성적 존재로서의 권리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될까? 성폭력이 누구의 시각에서 왜 저항해야 할 일인지 생각해보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성폭력 처벌 규정은 오히려 성적 약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공포와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성적 차별과 폭력의 고리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여성의 정조를 통제하겠다는 법

원래 우리나라 형법은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라 불렀다. 여성의 성적 순결과 정조를 유린한 남성을 국가가 처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형법은 97년 개정을 통해 32장의 이름을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꾸었지만, 정조권을 지키겠다는 법의 시각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우선 현재 법에서는 ‘여성의 질’에 ‘남성 성기’를 삽입하는 것만을 강간으로 정의한다. 성기 외에 이물질을 삽입하거나, 여성의 질이 아닌 곳에 삽입하는 것, 남성 신체에 삽입하는 것은 추행으로 분류되고 약한 처벌이 따른다. 다른 나라 법에서 강간이 ‘사람의 신체에 대한 삽입’으로 정의되고 있는 추세(각주:1) 독일형법은‘성행위(sexuelle Handlung)’를 성폭력의 기본적인 행위개념으로 설정하면서‘성교 또는 신체삽입과 연관된 유사성교행위’에 대하여 가중 처벌하는 규정체계를 두고 있다. 독일 형법 제177조제2항은 신체삽입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특별히 굴욕적으로 취급하는 것’도 유사성교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형법은 강간을‘사람에 대한 성적 삽입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제222-23조), 미국의 주법도 대체로‘sexual intercourse’를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있고, 뉴저지주 형법의‘sexual penetration’은 독일의 신체삽입행위와 거의 같다.)와는 한참 다르다. 남성 성기의 삽입만을 강간으로 규정하는 현 제도는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순결을 잃게 한 행위’를 처벌하겠다는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최근 위헌결정이 난 혼인빙자간음죄도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에게 혼인 약속을 통해 간음한 경우를 처벌하는 법이다. 비슷한 폭력이 발생해도 그 피해자가 음행의 상습없이 정조를 유지하고 있던 여성인지 아닌지, 즉 법이 보호해줄만한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과정이 더 중요한 셈이다. 이 법의 존치론자들은 카사노바에 의해 쉽게 피해를 입는 여성들의 취약성을 말하며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조항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여성은 성적으로 무지할 것이며 이런 음전한 여성이라면 ‘결혼 약속’에 쉽게 낚이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라는 시나리오를 확산해왔다. 이 법은 ‘순결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왔는데, 이 법으로 고소하는 여성은 이제 ‘순결을 상실한 여성’으로 규정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처벌사례는 거의 없고 사문화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이다.

성폭력 사건이 법적수사를 받고 재판을 치르는 과정 중에도, 이러한 ‘피해자 보호’를 위한 사전 ‘피해자 분류’는 일상다반사로 벌어진다. 수사담당자는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밤늦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곧 성관계를 기대했다는 뜻은 아닌지, 가해자와 사건 이후에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지를 물으며 그녀가 ‘꽃뱀’인지 ‘피해자’인지를 점친다. 여성이 물리적인 힘도, 관계에서의 협상력도, 성에 대한 주체성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수록 법의 보호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잣대는 역으로 여성이 성폭력 대상으로 더 좋은 표적이 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가부장적 성규범의 이중성

정조, 그것도 여성의 정조가 이토록 절대적인 보호의대상이 되는 이유는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사회의가부장적인 문화가 성에 대한 윤리와 규범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간통죄를 형사처벌하고있는 국가이다. 개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한 폭력적인 성에 대해서만 형사적 대책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사에 의했다 하더라도 ‘결혼 밖의 성’이라면 국가가 나서서 처벌한다. 최근 간통죄 위헌논쟁이 다시 벌어졌지만, 결혼의 신성성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형사 처벌권을 발동하는 것은 결혼제도라는 공익과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기본권 제한에 해당되며, 형벌 과잉이아니라는 주장이 여전히 다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 성규범이 개인의 인권문제와 부딪혔을 때, 인권은 ‘가정의 유지’라는 명분 아래 철저히 희생, 복속된다. 결혼 후 가정을 이루고 있는 여성들이 겪는 폭력의 문제를 보자. 결혼과 가족의 의미를 훼손하고 당사자에게 상처를 남기는 극심한 가정폭력 문제에는 반복되는 고통 끝에 용기를 내서 신고한다 해도 조정과 기소유예가 남발된다. ‘어쨌든 가족은 지켜라’는 주문은 결국하는 인식이 깔려있기도 하다. 만약 조○○ 사건에서 폭력의 대상이 가해자의 부인이었거나 성판매 여성이었더라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서명운동을 통해 도왔을까? 혹은 여성성기가 유실 되었다는, ‘여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보도내용 없이 신체적 폭행만이 알려졌다면 이토록 분노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동성폭력에 대한 광적인 분노와 성인 여성에 대해 ‘꽃뱀’의심이 동시에 펼쳐지는 곳에는 여성 정조를 통제하려는 음모가 숨어있다. 여성의, 여자아이의 정조를 우리가 지키자는 사명감, 이러한 사명감이 내세우는 ‘보호법’은상징적인대책일뿐실효성여부는고려되지않는다. ‘ 전자발찌 기한연장’과 ‘화학적 거세’가 대안인 양 이야기되지만, 정작 ‘애 얘기를 뭘 믿고!’라며 되려 부라리는 성인 가해자의 발뺌에 고소율과 기소율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어린이의 발언권과 권리의식을 높이기 위한 대책 같은 것은 왜 발표되지 않을까.

 

여성의 성적 경험에 대한 차별

여전히 사회가 ‘정조’를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당신에게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느껴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법의 잣대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인식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가부장적 성적규범을 위해 법은 의심, 비난과 보호라는 이중잣대를 양극화시켜 놓았지만, 법의 이러한 ‘조건부 보호’가 가능한 것은 여성에 대한성적통제, 감시가 일상적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를 겪고 난 피해자들은 수사 재판에서 느끼는 편견과차별을 일상에서도 빼곡히 경험한다.

‘요즘 여자들의 성’을 생각해보자. 여성의 성적 선택권과자유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10대 여성의 성경험 비율, 임신 비율, 여대생의 성관계 경험, 동거 현황이 꾸준히 연구되거나 언론에서 다뤄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성적 자유’가 이뤄졌는지 놀라기도 한다. 대학가나 도심유흥가에서 밤새 향락을 즐기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결혼이나 출산의무 대신에 자유로운 독신생활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지도 흔한 뉴스거리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가 영화, 드라마에도 등장하고 성적 지향, 성정체성은 개인 선택이지 그게 대수냐는 세련된 인식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성에게 ‘성적 자유’는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성인 여성이 데이트 관계에서 자유로운 성인으로서 섹스나 동거 제의에 자발적으로 응하라고 제안받아 선택하지만, 다른 상대가 좋아졌다고 하면 ‘동영상을 유포하겠다’ ‘부모나 직장에 알리겠다’는 협박이 따르는데, 이것은 실제로 사회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10대 여성의 성은 또래 남자들의 제의에서, 혹은 성인 남성들과의 원조교제나 성매매 시장에서 자유를 보장받는 듯하지만, 10대 여성의 성적 욕구나 안전한 선택을 위한 정보는 공식적인 성교육에서도 전혀 가시화되어 있지 않다. 10대 청소년들의 집단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얼마나 성적으로 왕성했으면’이라는 부모, 수사담당자, 학교 관계자, 주변인의 여론에 힘입지만, 상대 청소녀의 경우 혐오와 차별적인 시선에 집요하게 놓인다.

여성의 성적 경험이 드러났을 때, 주장될 때, 혹은 규범에도전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연예계의 몇 가지 사건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섹시아이콘으로 유명세를 누리며 무대와 스크린을 자유롭게 누비는 듯 했던 여가수, 여배우는 사생활 동영상이 유포되었을 때 스스로를 처벌하듯 브라운관을 떠났다. 간통죄로 고소되었던 모 여배우, 자신의 성경험을 책으로 펴냈던 또 다른 여배우는 여론의 싸늘한 외면에것이기에 그것을 폭력이라 일컬을 수 없다. 폭력이라 인정하면 모든 가정이 깨진다는 주장이다.

일상화된 성적차별, 폭력을 경험하는 성인 여성들이 이러한 법의 ‘정조권’잣대와 싸우는 동안, 아동성폭력에 대한 법적 수위는 단호히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성적으로 무지한(해야 하는) 여아의 몸이 성폭력을 통해 성적인 몸이 되었다는 것’을 용납하거나 감당하지 못사라졌다. 얼마 전 미국에서 누드사진이 돌게 된 것을 안 어느 10대가 자살했다는 뉴스는 어떤가.

성관계 경험이 많거나 무지하거나, 성폭력 피해를 겪었거나 한 번도 겪지 않았거나, 섹시한 몸이거나 성적 어필을 못하거나, 이성애자거나 레즈비언이거나 - 어떤 경우에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피해갈 수 없다면? 차별과 배제의 시선을 조건부로 안고, 보호받거나 폭력의 대상의 되거나 한 끝 차이 속에 살아가야 한다면?성적 자유와 선택권이 성별에 따라 차별적으로 구성되어있고, 결코 인권의 영역으로 보장되어 있지 못한 사회에서개개인 여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협상과 싸움,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취약함을 낳는다. 성적인 존재로서의 자신과 통합되기 위하여, 관계를 맺고 안전하게 살아나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권의 영역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을 느끼는 핵심적인 원인은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1차적 성폭력이기보다는, 성적 (피해) 경험에대한 편견과 배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차별없는 성적자기결정권을 요청하며

여성과 성적 약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은 너무 오래된 주장이라 사실 지루하고 식상하기까지 하다.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당연한 듯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 여성과 어린이 피해자로 보호의 대상을 이분해 위계화하고, 아는 사람에 의한 일상의 성폭력이 70%이상을 차지한다는 그동안의 보고를 고려하지 않고 가해자를 ‘정신이상자’와 ‘성욕과잉자’로 전제하는 퇴행을 보면서 우려가 커진다. 아직도 고소율이 10%가 되지 않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의심이 횡행하는 환경에서 극소수의 가해자를 분리하여 전자발찌와 징역을 극대화하는 것이 대책이 될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성폭력 경험이 평생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다고 선전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약자들의 무력감, 취약성은 다른 힘, 정당한 자기언어를 얻어갈 수 있을까?

최근 정부는 저출산 대책으로 낙태를 줄이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보건복지가족부와 일부 산부인과 의사모임은 불법낙태를 색출하고 단속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안전하게 섹스할 수 있는 환경, 피임에 대해 잘 알고 주도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진다면 낙태하라고 해도 하고 싶어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한쪽에서 위태로운 자유를 부추기고 한편에서는 차별과 비난을 작동시키는 사회, 필요할 때 출산을 강요하고, 필요할 때 낙태를 묵인하는 사회. 이 안에서 우리들은 무슨 희망과 즐거움으로 출산캠페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성폭력이 줄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인격, 건강, 평화, 관계, 평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권리를 더 힘 있게, 더 넓게 증진시키지 못하는 방식의 대책은 성폭력에 대한 예방은 물론이고, 경감도 기대할 수 없다. “성폭력예방, 피해자보호”라는 구호가 차별과 배제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 “차별 없는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로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