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대 총학생회 선거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지영|편집위원|bokshoong@gmail.com
올해는 참 선거 분위기가 안 나는 것 같아,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제43대 고려대 총학생회 총학생회장단 선거는 과연 그러했다. 색색의 점퍼를 걸친 ‘텔레토비’선본원들이 캠퍼스 이곳저곳을 오갔지만 선거 기간 동안 그나마 공론화된 것이라고는 모바일 투표 실시 여부를 둘러싼 공방과 몇몇 후보들의 자질을 따지는 루머성 논란들뿐이었다. 합동유세가 연기되는 등 중선관위의 연이은 실책 속에서 위태롭게 지속되던 선거운동은 의외로 투표율 57.3%라는 결코 적지 않은 참여를 낳았다. 하지만 2000년 이래 두 번째로 연장투표 없이 절반의 투표율을 넘긴 선거였다는 의미를 되새김질하기에도 민망하도록, 상대 선본에 대한 비난과 비난에 대한 비난으로 개표를 기다렸던 학생들은 꼬박 하룻밤을 지새우고 나서야 대강당 앞으로 투표함이 옮겨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법대신관과 중앙광장, 공학관 등무려 6개소의 투표함에서 선관위의 관리 미숙으로 천여 장의표가 공중분해 된 후에야 선거 판도는 그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쯤 되니 문득 궁금해진다. 왜 43대 총학생회 선거는 시끌시끌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음에도‘흥이 나는’느낌을 가져다주지 못한 걸까?
매년 겨울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을 두 번 이상 겪은 사람이라면 42대 총학생회 선거와 43대 총학생회 선거의 양상이 달랐음을 느낌으로나마 파악했을 것이다. 물론 케케묵은 계보를따져가며 선본들을 NL, PD, 비운동권 등으로 분류하는 이른바‘운동권 대 비운동권’의 구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이러한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총학생회가 되겠다는선본들의 홍보문구 또한 여전했다. 그러나 이분법을 해체하고 진정한‘학생회’를 만들겠다며 선본들이 제시한 전략은 1년새 성큼성큼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뒷걸음질 치다 자리 잡은 그곳에 <2010 소통시대>의 당선이 놓여있으며,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오히려 왜소해져가는 학생사회의 슬픈상이 있다.
반절의 수확, 그러나
변화의 흐름을 되짚기 위해 작년 겨울의 42대 총학생회 선거를 상기해보자. 지난 42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고대공감대 2009>선본과 <젊은고대, 깨어나다!>선본은 학생들에게각자의 정치성을 뚜렷이 각인시키며 그 정치성 속에서 다양한요구들을 조화시킬 능력이 있음을 어필하였다. 가령 <고대공감대 2009>는 전년도 고대공감대 총학생회를 계승한‘원조복지’의 적임자임을 내세우면서도 등록금 문제를 비롯한 사회현안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힌 한편, <젊은고대, 깨어나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정부와 학교에 강력히 대항하는 총학생회가 되면서도 학생복지위원회의 특별기구화를통해 복지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갈 것임을 정책자료집에명시했다. 이렇듯 두 선본은‘운동권 대 비운동권’이라는 단순한 대립선상에 놓여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우선시하는 영역을 확실하게 다진 뒤 그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학생회의 역할범위를넓힐것을선언했다.‘ 비운동권은사회문제에생각이없어보인다’,‘ 운동권은학내복지에신경쓰지않더라’는편견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으로 그들은 총학생회가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영역에 가닿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고대, 깨어나다!>의 당선을 단순히 비운동권에대한 운동권의 승리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조금 더정확하게해석하자면,‘ 운동권대비운동권’의구도속에갇혀 있었던 표심도 이분된 구도를 해체하려는 두 선본을 보며 빗장을 풀었고, 당시의 정세적 요구 등이 결합되어 결국 <젊은고대, 깨어나다!>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42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오갔던 논쟁점에는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총학생회가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역할을 찾는 것과 학생들이 총학생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수십 년 전 대학에 학생회가처음으로 결성되었을 무렵, 학생사회에는 독재타도와 사회변혁에의 공통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선도하는 학생회와지지하는 학생의 관계는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학생사회에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합의된 의지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며, 오히려 목적성을 잃은 학생회가 스스로의 존립기반을 위해 학생을 필요로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더 이상 자신과 총학생회와의 관계를진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공통된 의지를 표상하지못하는 총학생회에게 보내는 학생들의 메시지는‘이것 좀 해주세요’류의 단발적인 요청 혹은‘그런 행동은 마음에 들지않는다’식의 개인적 성향에 따른 평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이는 개인의 의견이 단순한 푸념으로만 남지 않고 공론화되어공동체에 반영될 수 있는 체계적인 수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탓이기도 하나, 무엇보다도 각자의 삶 속에 오늘날 학생회로의 소속을 통해 학생사회를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을지에대한 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임을 개개 학생들이 이른바‘정치’에 무관심한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재정권과 같은 역사적 조건이 학생회의 활성화를 불러냈기에, 그러한 상황이 해체된 지금 학생회의 필요조건은 학생회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손으로다시 구성해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42대총학생회 선거는 총학생회 스스로가 무엇을 잘 할 수 있을지대한 논쟁을 지펴 학생회가 담지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역할의 주체가 될 학생들이 어떻게 다시 공동체 안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백을 남겨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빈 공간을 채우는 몫은 당선된 42대 총학생회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42대 총학생회장단으로 당선된 <젊은고대, 깨어나다!>는 이러한 빈 공간을 채우는 데에서 뼈저린실패를겪었다.‘ 큰문제를해결하기위해의견을모으고행동을 통일하’고자 했던 42대 총학생회는 그 정치성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득해낼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여론조사를 통해 총학생회의 행동이 다수결의 원칙에입각해 어긋나지 않음만을 강변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은 행동하는 구성원으로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앞서나간총학생회의 정당성을 입증해주는 원자와도 같은 존재가 되고말았다. 총학생회의 행보를 두고 분열되는 여론 속에서, 작년겨울 <젊은고대, 깨어나다!>를 당선시켰던 표심은 주 공약 중하나였던 등록금 인하 투쟁을 성사시킬 실질적인 힘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43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또다시‘표 1장’분의역할만을 맡게 되었다.
퇴행하는 담론, 소멸하는 총학생회의 가능성
이러한 상황 속에서 43대 총학생회 선거의 판세를 결정지을 조건은 42대 총학생회 선거 때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어떤 선본이 더많은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가’로 승부수를 던지는 것은 이미 42대 총학생회 선거를 거치면서 시효를 다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등록금 인상은 누구나 ‘결사반대’하는 문제이며, 무료시사회라던가 지역 상권과 연계한 할인카드를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비운동권’만이 전유하는 강점이 못 된다. 물론 계획의 실질적인 성사가능성 여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 선거에서는 4개 선본 어느 한 곳도 빼놓을 것 없이 등록금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한편으로는 학생식당과 음료자판기의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장담했다. 모두가 제안한 정책과 대안은 모두가 말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선거기간 동안 별로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지 못했다.
여기서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통’이라는 화두의 등장이었다. 네 선본들은 지금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것은 총학생회와 학생 간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의 회복이라고 판단하여, 이에 각자의 입장을 녹인 정책들을 내놓았다. <함께, 멀리> 선본은 전체학생대표자회의와 중앙운영위원회의를 인터넷 생중계함으로서 대표자들의 회의에 학생들이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동시에 콜센터 운영으로 총학생회와 학생 간접 촉 빈도가 높아지는 것을 꾀하였다. <Movin’Movin’> 선본은 ‘선언하는 총학생회가 아닌 논쟁하는 총학생회’가 될 것을 말하며 과반과 동아리 등에서 총학생회의 지향과 학생들의 의견이 맞부딪혀 토론하는 장을‘KU-Union Debate’라는 이름으로 형성하겠다고 밝혔다. <희망충전> 선본은 유세기간 동안‘희망3000’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직접 만나 총학생회에게 바라는 바를 물어봄으로써 ‘발로 뛰며 소통하는 총학생회’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마지막으로 <2010 소통시대> 선본은‘먼저 말하기보다 먼저 듣는 총학생회’를 표방하며 개개 학생들의 의견이나 요구사항을 가장 우선시하겠다는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각 선본마다 상이한 차이가 있지만, 기술한 공약들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들을 것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올해 네 개 선본들은 ‘소통하는 자세’를 가지고‘학우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이 총학생회와 학생의 간극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대책이라고 말하였다.
표면은 상이하되 본질은 같아 보이는 ‘전략’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43대 총학생회 선거는‘소통하는 자세’를 가장 반복적으로 주장한 <2010 소통시대>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총학생회의 기본되는 역할이 전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그것을하나의입장으로내세우는것이라면,‘ 총학생회와 학생들 간의 유기적인 소통’은 총학생회의 임무를 동어 반복하는 수준일 정도로당연한 말이다. 즉,‘ 소통’의 주창은 이미 기본 사항으로 동의된 것을 구체적 지향인양 포장함으로써 오히려 총학생회의 존재에 대한 논의의 수준을 퇴행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42대 총학생회의 행보는 단순히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실행했다는 수준에서 비판될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얻은 정치성을 추진함에 있어 개개 학생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축소시켰다는 점에서 더 세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올해 선거에서 42대 총학생회가 남긴 실패와 공백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네 개 선본들의 평가는‘소통의 부재’라는 단 두 마디로 소급되었다.
그렇다면 담론의 퇴행이 ‘동어 반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한 <2010 소통시대>의 당선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과적으로 이는 개개 학생들의 삶 속에 학생회가 차지하는 의미를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듣는 자세’가 총학생회의 최우선기치가 됨으로써 개개 학생들은 아쉬움을 느낄 때만 총학생회에게 대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구성원의 임무를 다하면 되고, 총학생회 또한 학생들에게‘밉보일’짓만 하지 않으면 그 정체성에 아무런 무리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속에 ‘함께 가는 공동체로서 어떤 학생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부재하다. 이로써 42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어렵사리 펼쳐졌던 ‘총학생회의 전방위적 포괄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물론, 개개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적극적 소속감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깔끔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부족했던 그 무언가는 어디에
시끄러운 잡음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선거 분위기’가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렇듯 선거에서 오갈만한 제대로 된 논쟁거리가 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43대 총학생회 선거의 양상을 판단함에 있어 <2010 소통시대>의 당선을 전부로 파악하여 결론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통’이라는 화두를 말함에 있어 타 선본과 가장 차별화된 공약을 내세운 선본인 <Movin’Movin’>은 무조건 들어주며 반영하겠다는 식의자세를 경계하며 총학생회의 지향과 학생의 의견이 어느 부분에서 다른지 드러내어 합의∙토론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자치단체들의 43대총학생회선본평가자료집 <야이빵꾸똥꾸야!> 참조 가령 <Movin’Movin’>선본이 현재 대학이 상업화에 물들어있다고 판단하고서 그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학생들 앞에 적극적으로 드러낸 후 토론을 거쳐 더 구체적이고 동의할 수 있는 방안을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퇴행적인‘소통’담론 속에서 학생회가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서서 학생사회를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거쳤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그것은 단순히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요구를 대리하지 않고,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한다는 차원으로까지 사고의 폭이 넓혀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학생들과의 토론을 통해 총학생회장단의 의지를 공론화하겠다는 낙관적 의지가 아니라 지금 왜 개개 학생들이 총학생회로‘수렴’되어 대학의 상업화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설득시킬 수 있는 총체적 기획이 아닐까? 대학 속 공동체의 상, 사회 속 대학의 상을 그리는 것은 학생들이 원자화되지 않고 함께‘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이다. 하지만‘총학생회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좋다’와‘내가 이런 행동에 참여해 봐야겠다’는 생각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Movin’Movin’>선본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며 학생들의 활발한 참여를 기대하고 있지만, 선거 기간 동안 막상 개별 학생들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학생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지에까지 논의가 가닿지는 못했다. 즉, 총학생회와 괴리되지 않은 한 명의 주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학생이 총학생회의입장과 행동에 끄덕이거나 도리질치는 수동적 존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토론의 장’을 열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낙관적 의지의 표명만으로는 42대 총학생회가 남긴 실책처럼, 총학생회의 행보와 학생들의 반응이 조응하지 않을 경우 결국 총학생회는 자신들의 정치성을 입증해줄 존재로서만 학생들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총학생회’로 거듭나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길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다시, 2010년을 그리며
다시 대학에 학생회가 처음으로 생겨났던 그 때를 되짚어보자. 지금의 학생회는 과거와는 다르게 학생사회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적어도 42대 총학생회 선거에서까지 선본들은‘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학생들이 열심히 뛰는 학생회에 반응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2009년, 제43대 총학생회 총학생회장단 선거에서는‘열심히 하겠다’는 식의 낙관적 전망마저 그 길을 잃은 듯 보인다. 목적성을 잃은 총학생회에 이제 지향은 보이지 않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식의 자세는 역설적으로 학생들이 총학생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체가 될 가능성을 상실케하였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앞서 말한‘각자의 삶 속에서 오늘날 학생회로의 소속을 통해 학생사회를 얼마나 바꿔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그에 대한 해답은 이제 개개 학생들과 더불어 또다시 학생회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열린 토론의 장’이 아니다. ‘항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창구’와 ‘항시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요청되어야 할 것은 열린 토론의 장이 필요한 이유의 확립이며 학생들에게는 어째서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담지할 주체로서의‘총학생회’가 필요한가에 대한 확신어린 전망이다. 다소 막연하고 두렵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2010년은 이러한 청사진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리는 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