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이성 : 허무한 상상력

해진|학생|hoof777@naver.com

 

음모론이라는 말이 있다. ‘히틀러가 여성이었다’라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주장부터 ‘UFO는 미 공군이 주도한 것’이라는 제법 거시적인 범위까지 음모론은 다양하게 퍼져 있다. 음모론에도 레벨이 있어 어떤 것은 꽤 신빙성이 있는 반면 어떤 것은 사이비 교단의 흰소리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흥미가 생기기도 하고 아는 지식 한두 개를 추려서 지저분한 사견을 보태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정제된 음모론으로부터 축적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굳이 음모론이라는 단어를 찬양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있어 호기심을 가지거나 의문을 품는 습관은 늘 따라붙기 마련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때때로 삶의 일부에 자리 잡은 무미건조한일들에도 그 정당성을 되묻게 한다. 앞으로 소개할 두 영화 또한 우리가 당연시했던 것들의 전복을 보여주기 원한다는 점에서, 일견 달라 보이지만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이들은 인간 이성이 이룩해 놓은 것들에 회의를 품으며 의문을 제기한다.

 

<맨 프럼 어스>: 용두사미 격 호기심

영화는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교수 ‘존’의 송별회를 위해 동료교수들이 모여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가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이유를 얼버무린 덕에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인 돌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것이 크로마뇽인이 쓰던 석기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존이 불쑥 말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이 질문은 영화 <맨 프럼 어스(The Man From Earth)>에 있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시나리오는 이 질문에 대한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장하고 반박하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이외에 어떤 장면도 삽입되지 않는다. 게다가‘만 사천 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얼핏 동화적인 측면이 있을 만큼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토론이 얼마나 흥미롭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영화는 모든 등장인물이 각기 나름의 분야에서 업적을 쌓은 교수라는 방어막을 통해 흐름을 이끌어간다. 생물학, 종교학, 인류학 등의 전문가인 교수들은 이 ‘흥미로운’(것 같이 여겨져야 하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나간다. 구석기 시대부터 서기 2000년대까지를 따지면 인류는 만 사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간을 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럴 수는 없을지라도, 영화 속 주인공들은 토론을 거치면서 세포가 자신의 재생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면, 노화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영구적인 신진대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가정에 합의한다.

존은 어렴풋한 기억에 바다라는 개념이 없던 광활한 벌판에서 사람들과 살았다고 말한다. 늙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범위 내의 일만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주변 사람들에 의해 악마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평범하게 살아왔고 다만 몇 개의 학위를 받았을 뿐이다.

이런 말만으로 불사의 존재가 증명될 수 있을까? 당연히 동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며 보통 사람이 보일 만한 평범한 반응을 보인다. 장난치지 말라며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고 교과서를 보고 짜맞추면 그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명확한 증거를 대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전개는 다소 두서없이 난삽하게 이어진다.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한 토론이 조금 지루해졌을 무렵에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료들이 장난스럽게 그런 당신을 만든 하느님에게 뭐라고 할 거냐고 묻자 주인공은 충격적인 말을 꺼낸다. 자신이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서양으로 건너간 바가 있었다고 말을 꺼낸 존은, 로마에 대항하려 했으나 결국 패배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붙잡혀 고문을 당하면서 신진대사를 늦춰 죽은 체 하였다가 삼일 째 되는 날 무덤에서 도망쳐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했는데, 그 광경을 제자들이 목격하고 부풀려 해석해 버렸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예수라는 것이다. 이 말에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울부짖는 사람, 미친 듯이 아우성치는 사람, 정말 죽지 않는지 확인해 보겠다며 총을 꺼내드는 사람으로 작은 무대가 난장판이 될 즈음, 결국 그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다 꾸며낸 것이라고 말한다.

분위기는 다시 진정되고 상황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흥미로운 소설이었다’라는 등의 말을 남기며 모두 떠나간다. 그런데 그 무렵, 끝까지 남아 있던 심리학 교수가 배웅을 나온 존과 이야기하다가, 존이 옛날에 자신과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고 쇼크사해 버린다. 이윽고 존이 마지막으로 차를 타고 떠남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맨 프럼 어스>는 철저히 논리에만 근거한 흐름을 보여준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면 장면을 상상하기보다는 영화가 제기한 여러 철학적 의문들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결말로 미루어볼 때 영화는 스스로의 가설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학문적 증거들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이성이 의심될 수 있는 범위가 광대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교회와 왕의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신 없이 철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첨언이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들고 본 미국인들 또한 신, 특히 기독교의 신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 차원의 절대성과 같은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문화권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의 신성함에 대한 도전은 과감하고 충격적인 것이 될수있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교과서에서 읽은 지식은 수많은 학설들의 암투 끝에 도출된 것들이다. 그리고 이 또한 언제든 전복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과장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믿고있는 사실들이 모두 허상인 것은 아닐까? ‘다만 오늘 나의 안위만을 위한 삶’(1)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맨프럼어스>가 상상한 극단적 예외는 우리를 늘 존재했지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질문 속으로 이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다소 공허하다. 하나의 예외를 가정함으로서 빈틈을 찌르는 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는 점은 오히려 그 평가마저 깎아내릴 위험을 안겨준다. 인류학이 이룩해 놓은 업적과 기독교의 권위를 대사 몇 마디로 부정해 버리는 아이디어는 신선하지만 이 거대한 의문 앞에 놓인 관객은 지지부진한 토론과 허점이 보이는 논리에 끌려 다니다가 지치고 만다.

 

<2012>: 대책없이 소박한 대책, 인간애

<맨 프럼 어스>의 음모론이 인간의 존재를 초월할 만큼 거대한 질문이라면 <2012>의 음모론은 현실에 철저히 기반을 둔 비현실적의문이다. 재난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태양폭풍으로 인한 지각변동이다.(2) 영화는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입장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대 재난에 서서히 접근한다. 지구가 곧 종말을 맞이할 것을 미리 예견한 과학자,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두려워하는 정부, 재난을 대비해 비밀리에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거대한 잠수함을 만드는 공사 현장에 끌려가는 노동자, 이 배에 탑승할 수있는권 한을10억 유로를 주고 산 사업가, 그리고 이 재난과 음모 가운데에 서 있는 평범한 이혼 남성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이 모든 일들을 예견한 한 미친 사람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파악하고 가족을 구하고 고용주도 cine_1.JPG구하고 인류도 구한다.

<2012>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이 제기되고 족족 맞아떨어진다. 정부는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것이 두려워 지구의 멸망을 숨기고,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잠수함의 탑승권을 재계의 거물들에게 판다. 이와 유사한 음모는 오히려 현실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최근의 예로 H1N1(신종플루)에 얽힌 음모론들을 들 수 있다. 1차대전 당시의 언론탄압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해 많은 사상자를 낸 스페인독감의 악령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타미플루를 만드는 회사의 최대 주주가 미국 부통령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특수효과는 교황청이나 에펠탑 등 익숙한 건축물들과 함께 우리의 일상에 대한 믿음도 함께 부순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육지가 물에 잠기는 판국에 개인은 초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인류의 기술력은 이를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잠수함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무차별적인 재난에 대응하는 존재로 영화가 내세우는것은 감탄할 만한 기술적 성과가 아니라 아주 소박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기계의 고장으로 배에 타려고 했던 사람들을 태우지 않고 출발하려는 상황에서 분노를 느낀 젊은 과학자가 사람들에게 이들을 버리고 살아남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진지하게 호소한다. 모두들 그의 말에 감동하여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주인공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기계를 고치기 위해 뛰어든다. 결국 재난을 예고한 과학자의 두뇌도이를 극복한 기술력도 아닌 인류애와 자기희생을 통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살아남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뛰어들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모두 감동해야 하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애를 쓰고 구하려는 자들은 돈을 주고 탑승권을 산 사람들이다. 때문에 인간다움에 호소하는 목소리나 주인공의 살신성인은 돈도 없고 주연배우도 아닌 관객에게는 유치하게 다가온다. 결국 <2012>의 음모론은 비록 아무 맥락 없고 때로 다수를 짓밟는 권위를 옹호하더라도 그것이 이타주의나 희생 따위로 불릴 수 있다면 선하고 좋은 가치라는 결론에 도달해 버린다.

 

의심하는 인간

두 영화의 연출은 서로 매우 대조적이지만 설정 상 공통점이 많다. 우선은 음모론적인 상상이 영화를 이끌고 있다. 이는 넓게 말하면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약간 다르다. <맨프럼어스>는 새로운 관점의 사고를 통해 지식의 영역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2012>는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해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주고는 이를 선한 가치 같은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 버린다. 즉 두 영화 모두 인간의 이성을 위협하는 대단한 것들을 등장시키지만, 이들은 끝에 가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의 현재는 수많은 귀납적 증거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불안하게 세워 놓은 인간은 확신을 위해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예측하기를 원하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때 인간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다듬어진 인간의 이성이다. 감각의 오류와 기계의 오작동이 있더라도 인간의 이성은 이를 파악하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뢰 없이 문명은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이 부정당했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두려워한다. 게다가 실상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그다지 넓은 범주가 아닌 탓에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정당성에도 한계가 생겨나게 된다. 실제로 연약한것들은 종종 무너진다. 그것이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멀더의 속삭임이든 빅 브라더적인 음모론이든 인간에겐 대책이 없다. 오히려 국가 차원의 비리라면사회 내에서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만‘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2012년에 정말 세상이 멸망할까?’와 같이 터무니 없지만 아니라고 못 박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스스로가 바보 같이 여겨진다.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완벽해도 완벽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딜레마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

결국 출발 지점에서 너무 비껴나 버린 의문점들은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성에 의지해 나아간다. 누구든 수많은 모순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 또한 모순 없는 완벽한 해결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다.

물론 이성이 이뤄 온 작업들을 부정해 나갈 수는 있다. 밝히지 못한 많은 존재를 주장하면서 불사의 인간을 가정할 수도 있고, 인류가 고증한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할 수도 있다. 그 부정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과정을 겪어 가면서 입증된 논리들이 오류를 수정하고 견고해진다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게는 점차 진리에 가까워지는 과정인 셈이며 스스로를 확고히 세울 수 있는 기반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성에 대항하는 과정 또한 이성으로 이루어진다. 이성적인 기준에 의해 갈려진 좋고 나쁨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들부터 기술의 오류와 같은 물질적인 폐해 등은 이성의 권위를 떨쳐내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이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